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앞두고 그리스어를 익혀 보고자 서점에 가서 책을 찾았다. 그러나 실패! 현대 그리스어 회화 교재라는 확신을 주는 책이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안 그래도 몇 권 되지 않는 책이 희랍어, 헬라어 등 워낙 다채로운 이름으로 나와 있기도 하고.. '혹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 전도하던 시절 그리스어?'
결국 여행서적으로 유명한 론리 플래닛의 프레이즈북(phrase book, 흔히 쓰는 외국어 문장을 모아놓고 가르쳐 주는 책)을 한 권 사서 죽 훑어보려는데 이건 뭐.. 우선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어지간한 서양 언어는 흔히 알파벳이라 부르는 로마 글자를 알면 대충 읽을 수 있는데, 서열상 그리스 문명이 로마 문명의 선배인 관계로, 로마에 영향을 줬으면 줬지 로마의 영향을 받지 않은 그리스에는 그리스 고유의 글자가 따로 있었던 것. 이 그리스 고유의 글자 중 알파(alpha), 베타(beta)가 자모 순서상 가장 앞에 오는데, 여기서 알파벳(alphabet)이란 말이 유래하기도 했고..
영어, 수학을 다 잘하는 사람도 있지만, 다 못하는 사람도 있고, 마치 상극인 양 둘 중 하나만 잘하는 사람도 있다. 수학보다 영어가 나은 사람 중엔 수학이라면 진저리가 쳐져서 영어로 망명 온 기분으로 사는 사람이 많은데, 그리스어를 익히다 보면 망명에 실패해서 본국으로 송환되는 느낌을 갖게 될 때가 종종 있다. 왜? 그리스 글자가 죄다 수식의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α, β, γ, δ, θ, λ, π, Σ 등. 여하튼 익숙한 듯 생소한, 이 그리스의, 원조 알파벳은 'Α(알파)부터 Ω(오메가)까지'!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요한계시록 22:13)"
아테네에 도착해서 적잖이 후회를 했다. 스쳐 지나가는 모든 그리스 사람들이 죄다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던 것. 조금의 여지도 없이 꽉 찬 느낌의 영어 구사! 게다가 한국에서 온 내가 그리스어를 쓰리라고는 그리스 신화가 만들어지기도 훨씬 전, 그 아득한 옛날부터 조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듯한.. 아무리 애를 써도 그리스어 한 마디를 못 쓰겠다.
이와 같은 사태를 두고 몇몇 그리스 사람과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스어만 해가지고는 먹고 살기 힘들다."
그래서 쓰임이 많은 영어는 물론이요, 돈 되는 각종 외국어 배우기에 혈안이 돼 있다는 그리스 사람들. 그러나 지금은 사실상 망해 버린 고대의 제국! '슬프다!'
며칠이 지나 시내를 좀 쏘다니다 보니 간단한 인사말 정도는 그리스어로 할 여지가 생기기도.. 경기장 가는 셔틀버스 기사에게 그리스어 몇 문장을 외워 썼더니 좀 무리한 부탁도 쾌히 들어준 일이..
파르테논 신전을 내 눈으로 처음 보았을 때의 감동을 다시 한 번 떠올린다. 파괴와 약탈의 잔해임에도 불구, 여전히 아름다운 파르테논! 꼭 남이 아닌 듯한 당신의 그 저력이 다시 꽃을 피우고 속히 회복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