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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돈 Jan 03. 2023

배낭족 1세대 추억

사랑하는 딸의 유럽 여행에 부쳐

한 달간 유럽 아홉 나라 여행에 총비용 180만원이 들었다. 1992년 여름 얘기다. 1989년 해외여행이 자유화됐고 단체배낭, 호텔팩 등이 본격 시작되기 전이었으니, 개별자유배낭여행, 날(生)배낭여행 1세대 끝물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당시 성우들이 파업을 한 덕에 대학방송 아나운서였던 나는 광고 녹음을 통해 약간의 돈을 벌어 겨우 최소예산을 맞출 수 있었다.      


항공요금, 유레일패스가 도합 120만원이었으니 유럽에 들고 간 돈은 한화 60만원 상당. 한 달 동안 버티려면 하루 쓸 수 있는 돈이 2만원 정도. 그런데 저렴한 유스호스텔 하룻밤 숙박비가 대략 25,000원. 유레일패스를 이용해 여러 차례 밤차를 타거나 몇 밤 노숙을 해야 최소생존비용을 근근이 확보할 수 있었다.      


맛집이란 말은 나라 안에서도 밖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표현이었고, 상당 기간 식빵 두 쪽에 개중 제일 싼 잼을 발라 먹으며 숱하게 끼니를 때웠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스위스 라우터브루넨 어느 캠핑장에서는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가 만들어 먹던 스파게티 면이 꽤 많이 남았다는 얘기를 어떻게 전해 듣고는 순식간에 달려가서 그 남은 면을 무슨 마적떼 마냥 죄다 챙겨/빼앗아 가져다 먹었던 기억도..     


다국적 햄버거 가게가 하한선이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사람이 꽤 많다. 나의 경우는 여행 중 죽이 맞아 일행이 된 다섯 명이 각기 다른 이후 일정으로 헤어지기 전날 저녁 이별의 파티를 하기 위해 딱 한 번 찾은 곳이 유명 햄버거 가게다. 하한선이 아니라 상한선.      


‘남대문 옮겼다’, ‘천원짜리 동전이 나왔다더라’ 등 지난 세기 우리나라 군대에서나 유통됐을 법한 유언비어가 배낭족 사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기도 했고, 오류 많은 가이드북 몇 권이 정보의 전부였던 시절. ‘알프스에 가기는 가야겠는데 도대체 어디로 어떻게 가야 알프스에 가게 되는 건지?’     


“프랑스 다녀오신 분 계세요?”      


역에서 한국 배낭족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 혼자 여행 중인 것 같은 씩씩한 아가씨가 한 명 다가와 소리를 높인다.      


“그러면 가이드북에서 프랑스 부분만 좀 찢어 주세요.”     


다들 열심히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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