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열 선배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은 그해 1987년은 아직도 온전히 실현되지 못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묵직한 표석이 되었다. 그리고 열사께서 이땅에서 사셨던 시간보다 더욱 오랜 세월이 정신 없이 흘렀다.
골수 고대청년이 얼마나 출렁이는 가슴을 안고 이곳 신촌을 종종 찾곤 하는지 사람들은 잘 모를 것이다. 오늘도 학교 정문앞을 지나는 기차소리가 정겹게 들려온다! 전경들이 며칠씩 꼬박 날새며 진을 치고 있던, 길 건너 철길 아래. 군대 가기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지인들과 함께 있던 이곳을 경쟁학교 앞이라고 마냥 폄훼하기는 너무도 이상한 일일 것이고..
몇개씩 되던 ‘만미집’은 도대체 언제 어디로 간 걸까? ‘지리산’에서 민중가요와 함께 전의를 불태우며 맥주 마시던 시간. 전위적인 록음악만 틀어 주던 카페가 오늘날 양꼬치집이 된 것은 너무도 웃기는 일이다. 나의 그 옛날 기억은 죄다 중공(!) 수도 베이징 왕푸징에 소달구지 굴러다니던 시절 얘기겠지만..
헤이 야! 거친 파도와
헤이 야! 폭풍 속에도
헤이 야! 우리가 있어
헤이 야! 태양이 뜬다
가자 노래 부르며
가자 하늘 저 높이
연세 우리는 하나
연세 소리 높여 부르자
I love you, frien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