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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돈 Nov 09. 2020

언니들의 졸업식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여자 핸드볼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결국 우승을 차지한 노르웨이를 준결승에서 만난 것은 불운이었다. 왜 우리 선수들은 경기 종료에 딱 맞춰서 결정적인 골을 넣지 못하고 실점 가능한 약간의 시간을 꼭 남겨놓게 되는 것일까? 이번에 남긴 시간은 확실히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지만 공수전환이 워낙 빨랐던 노르웨이는 그 시간을 그토록 알차게 써버리고 만 것.


영상 판독을 수차례 거듭해 본 결과는 한결같았다. 노르웨이의 마지막 골은 절대 골이 아니었다. 그러나 핸드볼은 (당시) 축구 등과 마찬가지로 영상 판독 결과가 구속력을 갖지 않는 스포츠. 억울함을 실컷 호소할 수는 있겠지만, 이 같은 상황에 판정은 거의 절대로 번복되지 않는다. 그 정도의 미세한 실수는 유감스럽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심판의 권위를 제대로 세울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물론 너무도 현저한 오심은 항의와 제소의 대상이 되겠지만, 결국 미세한 오심은 경기의 일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대와 달리 결승 진출에 실패한 여자 핸드볼. 결국 헝가리를 상대로 3·4위전을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세상의 그 모든 3·4위전은 실로 맥 빠지는 경기가 아니던가? 물론 올림픽에선 반드시 이겨야 동메달이라도 따기 때문에 나름 치열함이 없지 않지만…. 여하튼 결승전이었으면 현장 중계석에 나갔을 것을, 아쉽게도 3·4위전이었기에 우리 중계팀은 국제방송센터 오프튜브 부스에서 TV 화면을 보며 중계를 하게 되었다.


B조 예선 중 이미 한번 겨뤄본 바 있는 헝가리. 예선에서 벌써 열한 점 차로 대승을 거둔 바 있는 상대였기에 별로 걱정할 일도 없었다. 그러나 언제나 방심은 금물. 전반전은 13:15, 우리가 두 점 뒤진 가운데 마쳤다. 그러나 후반 들어 차분히 점수를 쌓아간 우리 선수들은 공수 양면에서 최고의 기량을 선보이며 경기 종료 1분 30여 초를 남겨놓고 무려 6점을 앞서 가게 된다.


경기 종료 51초 전 33:28로 5점을 앞서고 있는 상황. 임영철 감독은 문득 작전타임을 요구했다.


“빨리 와 봐 빨리. 시간 없어 지금. 야야야야야! 잠깐! 마지막 피날레. 너! 이해해 줘야 돼. 마지막 선배들이야. 너. 그다음 … 홍정호. 정희. 순영이. 어? 영란이! 영란이. 그럼 몇이야. 하나, 둘, 셋, 넷, 다섯, … 여섯. 또 한 명? 안정화. 안정화. Set! 들어가!”


실은 쓰지 않아도 좋았을 작전시간. 그 무섭기만 했던, 냉혈의 승부사 임영철 감독이 이 작전시간을 통해 승부와 아무 관계도 없는, 또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을 갑작스럽게 터뜨렸다. 투박한 말투였고, 글로 옮겨 적어 놓으니 더욱 이상하기도 하지만, 이 몇 마디 말에 담겨있는 뜨거운 애정을 우리는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순식간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여러분 언니들의 졸업식을 함께 해 주십시오. 대한민국을 위해 10년이 넘게 헌신해 온 언니들의 졸업식입니다.”


자그마치 18년 동안 국가대표 생활을 해온 오성옥 선수. 언니들은 강산이 거의 두 번 바뀌는 사이 앳되었던 소녀가 아줌마가 다 되도록 몸을 내던지고 또 내던졌다. 그 사이 영욕의 세월이 화살 같이 흘러 지나가는 가운데 대한민국 핸드볼은 눈부신 영광의 이름을 얻게 되었던 것이고….


1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만큼 넘쳐 오르는 감동 가운데 약 1분의 시간을 보내 본 적이 과연 몇 번이나 될까? 결국 우리 선수들은 참으로 넉넉한 승리를 거두었고….


“우리 선수들은 결국 금메달보다 더 금빛 찬란한 동메달을 목에 걸게 됐습니다.”


편파판정으로 얼룩진 아시아선수권대회로 인해 올림픽 본선에 직행하지 못한 우리나라. 재예선 승리를 통해 본선에 가게 되나 했더니 남자의 경우와 달리 이건 이것대로 인정을 받지 못했고, 결국 별도의 국제연맹 예선을 통해 참으로 어렵게 진출하게 된 2008 베이징 올림픽 본선.


본선 무대에서는 여느 올림픽 때처럼 물을 만난 듯 특유의 집중력과 파괴력으로 선전의 선전을 거듭한 끝에 금메달을 따낼만한 충분한 실력을 갖고 있음을 입증해 놓고도 아쉽게도 동메달에 머물고 말았지만, 세상의 그 어떤 드라마보다도 아름답고 감동적인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었던 자랑스러운 우리 선수들.


“우리는 이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고통 속에서도 끈질기게 생명력을 유지하면서 꾸준히 자랑스러운 열매들을 만들어나가는 우리는 이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대한민국 사람들입니다.”


대한민국 핸드볼은 대한민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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