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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돈 Dec 15. 2020

스포츠는 신성하지 않다

2012년 런던 올림픽 펜싱 여자 에페 개인 '신아람'

대한민국 펜싱의 메달 가능성은 첫날, 둘째 날에 몰려 있었다. 첫날은 여자 플러레 개인전.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아쉽게 은메달에 머문 남현희 선수가 오전 경기를 다 이기고 이탈리아 선수 세 명과 함께 4강에 올라, 준결승, 3/4위전, 결승전을 치르는 파이널 피스트에 선다.


그러나 준결승에서 아쉽게 패배, 결국 메달이냐 노메달이냐를 가리는 3/4위전에.. 3/4위전 상대는 4년 전 베이징 올림픽 결승전 상대였던 베찰리! 40이 넘는 나이에도 불구, 세계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플러레의 교과서, 남현희의 영원한 벽, 베찰리! 남현희는 또 한 번 이 벽을 넘지 못했고 결국 개인전에서는 메달을 목에 걸지 못하게 된다.


첫날 아쉬움이 컸지만 둘째날 기대가 커서 괜찮았다. 세계 톱랭커를 보유한 대한민국이 남자 사브르 개인전에서 두 개 이상의 메달을 챙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까지.. 그러나 김정환은 36강에서, 구본길, 원우영은 16강에서 줄줄이 탈락, 오후에는 못 갈 줄 알았던 교회에 다녀올 수 있게 되기까지..


여자 플러레에서 메달을 못 땄고 남자 사브르에서 망신을 당했는데 이제 가능성이? 아침에 경기장 나가면서 해설위원께 조심스럽게 ‘오늘은 어떻습니까?’ 여쭌다. ‘실은 오늘이 가장 걱정된다’고 하신다.


여자 에페 개인전. 기대가 크지 않아 오전엔 현장이 아닌 국제방송센터에서 중계를 하며 상황을 봤다. 그런데 ‘신아람’이라는 선수가 급격히 돌출하면서 급기야 4강 진출을.. 급히 점심을 먹고 현장 ‘엑셀’로 향했다.


준결승전 상대는 독일의 하이데만 선수였다. 실시간으로 중계가 시작됐다. 심판이 소개되는데 오경석 해설위원께서 대뜸 ‘오스트리아 심판이 배정된 건 좀 이상하다’는 말씀을.. 대개 출전 선수가 속한 대륙의 심판 배정을 피하는 법인데 심지어 상대 선수와 같은 언어를 쓰기까지 하는 심판을..


사실 신아람 선수의 경기를 그날 처음 봤지만, 신아람 선수의 컨디션은 그야말로 최고라는 느낌이었다. 전에도 후에도 그 이상이 없을 것 같은.. 그래서 무슨 일을 낼 거면 바로 이날 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루 종일 했다.


그러나 하이데만 또한 만만치 않은 선수여서 결국 정해진 시간 안에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승부는 연장전으로.. 토스 결과 신아람 선수의 ‘프리오리테’. 안 그래도 공격이 늘 조심스러운 에페지만, 굳이 공격해서 득점을 하지 않아도 실점만 하지 않으면 이기게 되는 유리한 상황. 그리고 그 유리했던 연장전의, 딱 1초가 남았다. 마치 지구가 자전을 멈춘 듯 영원처럼 느껴졌던 그 1초가..


한 없이 길어진 1초 사이에 하이데만이 득점을 해서 경기를 승리로 마무리한 것은 10대 소녀 자원봉사자가 시계를 제대로 작동시키지 않아 일어난 사태. 심판은 이에 대한 책임을 외면했고, 모든 피해는 고스란히 신아람 선수의 몫이 되었다. 1초를 제대로 진행하지 못해 겪게 된, 한 시간 가까운, 긴 시간의 일대 혼란! 그리고 깊은 상처!


펜싱협회 부회장이기도 한 오경석 해설위원께서는 중계석을 떠나 더 가까운 곳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시기도 했다. 신아람 선수는 줄곧 피스트에 앉아 공식적으로 경기 종료가 되지 않게 하고, 심재성 코치는 유창한 외국어로 계속 항의를 해 보지만.. 눈에 띄는 상황의 변화가 없는데 나는 중계를 계속해야 했고, 가끔씩 나오는 안내 방송은, 혹시나 귀 기울여 들어 보지만, 역시나 뻔한 얘기의 반복뿐이었고.. 


갑자기 진행요원 두 사람이 들어오더니 신아람 선수를 데리고 나간다. ‘상황이 제대로 정리된 걸까? 혹 신아람 선수의 결승 진출?’ 그러나 이내 3/4위전이 진행된다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방금 나갔던 신아람 선수가 다시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낸다. ‘스포츠가 아무리 신성하지 않기로서니 뭐 이래? 3/4위전은 3/4위전대로 충분히 준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여러분은 이 경기를 보고 싶으십니까? 신아람 선수는 이 경기를 하고 싶겠습니까? 저라고 이 경기를 중계하고 싶겠습니까? 하지만 신아람 선수를 그냥 내버려 두고 여기를 떠날 수는 없습니다. 신아람 선수도 본의 아니게 다시 피스트에 올라섰습니다. 2012 런던올림픽 펜싱 여자 에페 개인전, 신아람 선수의 3/4위전 경기를 본의 아니게 중계방송해 드리겠습니다.”


신아람이 금메달을 받아 마땅한 밤이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 특별히 큰 기대를 했던 세부종목이 다 지나간 가운데 펜싱은 아직 메달이 없고, 나는 앞으로 별다른 기대와 소망 없이 울분이나 삼키면서 이 펜싱 경기장을 닷새나 더 들락거려야 하고..




신아람 선수가 이와 같은 일을 당하고    이튿날부터 우리 펜싱 선수단은 기대 상의 선전과 함께 계속해서 메달을 따내고  따낸다. 김지연(여자 사브르 개인,  여자 금메달) 선수와 남자 사브르 단체( 단체전 금메달) 금메달을 비롯해 금메달 2, 은메달 1, 동메달 3개를 획득해 내며 결국은 대한민국 펜싱 사상 최고의 성적을 기록2012 런던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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