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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돈 Dec 02. 2020

펜싱 중계 - 불가능에 도전

축구 중계하는 사람은 원래 많다. 애초에 중계란 것을 시작할 때 방송이 많은 축구 아니면 야구 중 하나를 먼저 선택하기 때문이다. 축구를 선택하면 이후에 농구, 핸드볼, 하키 등 다른, 골 넣는 구기 종목으로 가지를 치는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유사점이 많으니까.. 야구를 먼저 선택하면 배구 등 골과 관계없는 종목을 이어서 하게 되는 경우가 많고.. 대충 이런 식으로 할 일을 정하고 배정을 받아 일정한 사람들이 일정한 종목을 일정 시간 반복해서 나누어 중계하다 보면, 아주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 자기 종목과 자기 종목이 아닌 종목이 대충 자리를 잡게 된다.


그런데 종합대회에 가면 가끔 자기 종목이 아닌 종목을 갑자기 중계해야 할 때가 있다. 익숙하지 않아 부담이 되기도 하지만, 어려울 때 도와주는 셈이니 나름 생색도 날뿐더러 원래 하던 사람 눈치 안 보고 나의 영역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해서 반기게 되기도.. 그래서 어지간한 종목은 누군가 힘들 때 대신할 사람을 찾는 게 생각처럼 어렵지만은 않다. 그런데 이 종목만은 예외다. 바로 펜싱이다. 내가 펜싱 중계를 하지 못할 때 대신하겠다는 사람을 찾기란..


10년 넘게 펜싱 중계를 하고 있지만 솔직히 말해 펜싱은 잘 보이지 않는다. 2012년 런던올림픽 여자 에페 개인 준결승 신아람 선수의 경기 중 그 길었던 1초에 대한 기억도 새삼스럽지만, 1초 안에 몇 번씩도 득점할 수 있는 너무나도 빠른 경기. 날카로운 칼끝이, 가느다란 칼날이, 작은 모니터 안에서, 현장 저 멀리서 그토록 빠르게 움직이고, 사실상 동시라고 느껴지는 그 모든 상황 가운데 1/25초 차이를 가리는.. 동작중 실시간 묘사가 중계의 절대원칙이라면 펜싱 중계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투수가 포수를 향해 던지는 야구공 실밥의 회전을 매번 실시간으로 정확히 묘사해 주는 것에 비유할까?


자주 지속적으로 하면 눈에 들어오는 게 더 많아지겠지만, 펜싱 중계는 대개 2년에 한 번, 올림픽 아니면 아시안게임뿐이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성적을 거두고 국민의 관심이 커진다 해도 큰 대회 마치며 해설위원과 나누는 작별인사는 늘 ‘2년 뒤에 뵙겠습니다'.


게다가 이 종목이, 또 이 종목 중계가 더 어려운 것은 공식용어가 불어이기 때문이다. ‘좀 할 줄 아는 영어 말고 반드시 불어만 쓰면서 여행을 다녀보라’고 할 때 애초에 불어 좀 한다고 하는 사람 아니면 대부분 어떻게 반응할까? 에페, 플러레, 사브르 등 생소한 세부종목 이름부터 경기 시작 또는 재개할 때마다 반복해 사용하는 ‘엉 갸르드’, ‘(에스커부) 프레’, ‘알레’ 등. 불어가 영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데 학부에서 영어를 전공한 내가 보기엔 어쩌면 이렇게 유사성이 없을까?


경쟁사에서 영어 용어를 가지고 자료집을 만든 걸 몇 번 보았다. 종목을 이해하고 죽 훑어내는 데는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경기 진행과 반복되는 판정이 온통 불어로만 이뤄지는 걸 감안하면 불어를 피하는 게 결코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을 더욱 하게 되기도.. 그래도 좀 알아들으면 큰 도움이 되니까.. 물론 어렵지만.. 너무 힘들면 태권도 중계를 하는 외국 아나운서와 해설자들을 떠올리며 힘을 좀 얻어 볼까나?


영국 유학 다녀와서 2001년경 이 종목, 저 종목을 탐색하던 중 느닷없이 펜싱을 한 번 맡았다가 된서리를 맞고 1년이 넘는 긴 시간을 다른 종목까지 변변한 배당도 못 받으며 주눅 들어 살던 때가 새삼 떠오른다. 내가 맡기 직전까지 펜싱을 중계한 전임자의 높은 경지는 차마 눈을 들어 쳐다볼 수도 없었고.. '왜 하필 이렇게 어려운 종목을..


절대 포기하지 마라. 난리도 하지 말고.. 특히 흙수저 동지들이여! '오죽하면 날 시킬까?' 누가 봐도 좋은 기회라면 남들이 챙겨 갖지 결코 쉽사리 내게 주어지지 않는 법. 별수없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다른 사람이 날 위해 좋은 기회를 애써 챙겨 주거나 그와 같은 상황을 거저 만들어 준다? 그런데 참으로 다행이랄까? 하나님께서 그런 별수없는 상황을 종종 만드신다. 또 아무리 봐도 영 별것 아닐 것 같은 일을, 또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 매번 보잘것없는 자 앞에서 큰 일로 만들어 펑펑 터뜨려 주신다.


"이 모든 걸 행하시는 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또 잠잠히 뜻을 구하며 기도한다. 그분 뜻이면 칼끝이 제대로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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