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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돈 Sep 17. 2020

중국어 안내방송을 못 알아들어서 가만 계시는 거죠?

중국이나 대만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기차나 전철을 타고 가다가 안내방송만 듣고 내려야 할 곳에서 잘 내릴 수 있을까?


안내방송은 '치엔팡따오짠스(前方到站是)..짠(站).' 대략 이런 식으로 흘러나온다. 직역하면 '앞쪽에 닿는 역은 ..역입니다'로 왠지 이 자체로 어색한 느낌인데, 정작 중국에서는 '시아이짠스(下一站是)..짠(站). (다음 역은 ..역입니다.)'과 같이 매우 깔끔한 표현을 쓰고 있어 우리 안내방송엔 적잖이 구차한 느낌이 있기까지 하다.


그런데 기차가 대전에 도착할 때쯤 되면, ‘열차가 잠시 후 '대전짠(站)'에 도착한다’는 희한한 표현이 또 흘러나온다. 한자 표기가 되지 않는 순 우리말 지명도 있고, 한자로 표기가 가능하더라도 지명은 고유명사이니 우리나라에서 발음하는 대로 발음해 주는 것이 원칙이기야 하겠으나, 문제는 세계 인구의 1/4이 넘는, 중국어만 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한국에서 '대전'은 '따티엔'이 아니라 바로 '대전'이라는 사실을 죄다 알게 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 과연 있을지..


발음기호를 써 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긴 하겠지만, 써 주는 사람이나 보고 읽을 사람 피차간에 불편함과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겠고, 일일이 우리 발음을 들려주며 익히게 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긴 하겠지만, 어느 세월에 이 사람들을 죄다 붙잡아 앉혀 놓고 어지간한 역 이름을 있는 대로 가르쳐 알게 할 수 있을까? 중국어 사용자들은 평생 가도 '東大門'을 '똥따먼'이라고 읽으면 읽었지, 애써 '동대문'이라고 읽어 보겠다며 소매 걷어붙일 사람은 거의 전혀 없을 텐데 말이다. 때마다 일일이 뒤적여 볼 사전도 손에 없고, 주위에 물으려고 한들 질문을 알아들을 사람도 몇이 없는데..


원래 한자로 표기되지 않는 '서울'은 중국어권에서 오랜 세월 '한청(漢城)'이라고 불러왔다. 이런 와중에 정작 '한청'에 사는 '한청'사람들은 자기들이 '한청'사람인 것을 내내 모르고 살아왔고.. 최근 중국과 교류가 활발해진 뒤 서울시에서는 우리말 '서울'과 제법 유사한 소리가 나는 '쇼우얼(首爾)'이란 새로운 말을 만들어 급속히 보급시킨 바 '서울'이 결국 '쇼우얼' 정도로까지는 그럭저럭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많은 우리말 고유어 지명 가운데 과연 몇 개나 비슷한 길을 갈 수 있을지..


그러나 저러나 이쯤 되면 적어도 '서울역' 안내방송 정도는 '쇼우얼짠(首爾站)'이라고 할 법도 한데 이것도 역시 '서울짠(站)'이다. 하긴 '대전역'이 '따티엔짠'이 아니라 '대전짠'일 바에야 '서울역'이 일관성 있게 '서울짠'인 게 법칙적으로는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여하튼 결론은 중화권 사람들이 중국어 안내방송의 도움을 제대로 받을 가능성이 이래저래 거의 없다는 것.


‘이왕 한다고 하는 건데 '따티엔', '똥따먼', '쇼우얼짠', '난잉', '롱샨', '루리앙진', '따팡', '신지', '용덩푸' (대전, 동대문, 서울역, 남영, 용산, 노량진, 대방, 신길, 영등포) 등으로 하면 안 되나?’ 이렇게 하면 중국어권 사람들은 안내방송의 도움을 한결 쉽게 받을 수 있겠지만, 정작 우리는 도대체 어디를 얘기하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게 되는 문제가 또 발생하게  된다는.. 물론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국내 중국어 안내방송의 효용에 국한돼 있다는 점에서 한국 사람이 중국어 안내방송을 알아듣거나 말거나 하는 문제는 결국 논외가 되기는 하겠지만..


'말' 문제는 말로만 풀면 될 것 같은데 그게 그렇게 생각처럼 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상호주의에 입각해 통상 서로 비슷한 서비스를 해 줘야 피차 면도 서고 일이 잘 되는데, 중화권에서는 우리말 고유명사를 늘 자기식대로 읽는다. (예: 따티엔, 똥따먼) 뜻글자(표의문자)인 자기들 문자로 결국 뜻도 잘 맞고 소리도 비슷한 새로운 단어를 계속 만들어 쓰거나 읽기는 워낙 귀찮기도 하고 품이 많이 드는 일이기도 하겠지만.. 그런데 애초에 한자 표기가 되지 않는 다른 나라말은 나름 힘써 연구해 비슷하게 바꿔 부르기도 하면서.. (예: 커코우컬러 可口可樂 Coca Cola)


중국과 수교 뒤 장쩌민 전 국가주석이 중국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할 때, 향후 중국 지명 혹은 인명 표기는 반드시 중국식으로 할 것을('인민대회당'이 아니라 '런민따후이탕'으로 - '인민대회당'이라고 하면 굳이 설명을 안 해 줘도 한국어 사용자가 그 구실을 더 쉽게 상상할 수 있음에도..) 거의 일방적으로 지시하다시피 하고 가서 자존심 상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중국의 모든 국영(!) 조선어 방송국에서는 우리말 고유명사뿐만 아니라 심지어 중국 지명과 인명까지 철저히 우리식으로 읽고 있는 게 ('쏭화쟝'이 아니라 '송화강'. '덩샤오핑'이 아니라 '등소평'.) 신기하기만 하다. 조선족이지만 국가의 통제를 철저히 받는 중국 국민들이.. 矛盾이 아닐 수 없다.


"마모나끄'월드컵경기장'에키데스."


일본어도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 한자문화권이란 점에서는 중국어와 같고 소리글자(표음문자)를 쓴다는 점에서는 사뭇 다르긴 하지만.. 영어로는 'This stop is World Cup Stadium.'이라며 바꿀 것 다 바꿔서 아주 제대로 해 주는 것과 비교해 볼 따 일어의 경우는 마냥 다르기만 하다. '와-르도깟뿌쿄오기죠(월드컵경기장 ワールドカップ競技場)'라고 해 주면 일본 사람들에게 더욱 확 와 닿을 것 같기는 한데, 일본에 대한 우리의 전통적 국민정서가 이와 같은 일을 애써 하는 것을 그리 내켜하지 않을지도.. 일본 사람 들으라고 하는 안내방송을 우리는 그냥 못 알아들으면 그만일 테기도 하겠지만..


같은 한자문화권에 속해 있어서 더 깊은 이해도 가능하고 소통이 더욱 편리할 것도 같은데 의외로 결코 그렇지 않은 현실을 곳곳에서 확인하게 된다. 단순히 말만의 문제도 아니어서 서로 다른 언어를 더 익힌다고 자동으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상호주의에 기대를 걸자니 중국어권과는 사용인구의 차이가 워낙 커서.. 그러나 최근에는 있는 그대로의 생생한 한국어가 한류 등의 영향과 함께 주변 국가에 적잖이 노출되며 대단히 익숙해지게 되었는데, 이와 같은 현상은 향후 우리들에게 문화적으로 매우 큰 힘이 될 것이다.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세 개의 언어문제를 당장 일거에 해결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교류가 많아지고 서로에 대한 이해는 깊어질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지금의 무지로부터 우리는 멀어져 갈 것이다. 이태원에서 영어가 자연스럽듯 명동에서 중국어와 일본어가 자연스러운 날은 벌써 왔다. 중국어 혹은 일본어 안내방송이 좀 더 자연스럽고 효과적인 것으로 바뀔 방도를 조만간 찾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 중화권과 일본에서 더욱 흔히 들을 수 있는 우리말 안내방송도..


열차가 고속터미널짠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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