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승돈 Oct 27. 2020

축구표, 얼마면 되겠습니까?

* 축구표 예매하던 날


인터넷으로 뮤지컬 입장권 4장과 축구장 입장권 2장을 예매했습니다. 런던 라이슘 극장에서 공연 중인 '라이언 킹' 입장권 4장과 토트넘 핫스퍼의 홈 경기장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펼쳐지는 토트넘과 첼시의 경기 입장권 2장. 그런데 뮤지컬 표 4장과 축구표 2장 값이 똑같습니다. 축구장 입장권이 뮤지컬 입장권에 비해 두 배 비싸단 얘기를 괜히 어렵게 했군요. 여하튼 그렇습니다. 영국에선 축구표가 이렇게 비쌉니다.


뮤지컬도 본바닥 뮤지컬, 축구도 본바닥 축구인데 시세가 이렇게 차이가 나네요. 축구장 의자가 극장 의자보다 편할 리도 없고, 축구 경기 시간이 뮤지컬 공연 시간보다 더 길지도 않은데 축구장 입장권은 이렇듯 상대적으로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뮤지컬은 매 회 거의 일정한 재미가 보장되지만 축구는 정말 재미가 없을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게다가 비라도 주룩주룩 내리면...


그런데 과연 제가 예매한 축구장 입장권 한 장 값이 도대체 얼마나 되길래 그 가치를 두고 이렇게 길게 얘기를 하게 되는 것일까요? 어렵게 구한 본부석 쪽 스탠드 상단 구석자리 하나가 자그마치 70파운드(약 12-13만 원)입니다. 아무리 명문 팀 간의 경기라지만 축구표 한 장 가격이 이쯤 되면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는 그만두고 말 사람이 많겠지요?


중요한 것은 축구가 상상 이상으로 큰 가치를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의 경우 축구는 그저 존재할 뿐, 그리 큰 가치가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입장료가 10만 원이 넘어도 꼭 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경기가 우리나라에는 과연 몇 경기나 있을까요? 그저 없지 않아 있는 축구, 강박관념을 가지고 억지로 봐 줘야 하는 축구가 아니라, 항상 일정한 가치로 와 닿고 갖은 의미로 차고 넘치는 축구가 실로 우리 축구의 미래여야 할 것입니다.


상상해 보셨습니까? 지금 이 순간 이 세상 어딘가에서는 거의 매주 한번 이상 10만 원 안팎의 가치를 갖는 축구 경기가 이 동네 저 동네에서 마구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또 지구 저 쪽 끝에 사는 어떤 사람은 그 비싼 표 한 장을 쉽게 구하지 못해 몸이 후끈 달아오르기도 한다는 사실을... 몇 년 전 태국에서는 영국의 명문구단 리버풀의 태국 방문 경기를 보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있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목숨을 걸고 보는 축구라...'


저는 절대로 축구에 대한 막연한 애정을 호소하지 않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축구에 목숨 걸겠단 사람이 많아진 것도 제겐 그리 바람직해 보이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축구가 제 가치를 갖는 것입니다.


* 축구장에 가다


주요 환승역으로 가면 굳이 지나다니는 사람을 붙잡고 경기장 가는 방법을 물어볼 필요가 없습니다. 유니폼을 입고 떼 지어 다니는 사람들을 따라 기차를 타고 내리면 금방 경기장 근처에 다다르게 됩니다. 길거리에서 3 파운드에 파는 공식 프로그램을 하나 삽니다. 구단 소식과 선수 명단 같은 것이 실려 있습니다.


경기장에 들어가 자리를 찾았습니다. 그래도 제일 뒷자리는 아닐 줄 알았는데 결국 제일 뒷자리네요. 70 파운드씩이나 되는 자리가 말입니다. 그래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현재 순위 1-2위 팀의 대결에 표를 구해 들어온 게 어딥니까? 하긴 너무 아래쪽보다는 조금 위에서 볼 때 경기가 더 잘 보이기도 합니다.


상상도 하지 않으시겠지만, 빈자리는 전혀 없습니다. 제 왼쪽에 앉은 사람은 독일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전 세계 축구팬들이 모두 다 보고 싶어 하는 축구 종주국의 최상위 리그, 그 가운데서도 최상위 팀끼리의 경기입니다. 꼭 이렇게 하려고 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하다 보니 운 좋게 이렇게 되었습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 가운데 경기장을 찾은 사람들에겐 할 일이 무척 많아 보입니다. 운동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다 참견 거리요, 격려 또는 비난의 대상입니다. '하긴 얼마나 많은 돈을 내고 들어온 경기장인데...' 심판의 모든 판정에 일일이 반응을 합니다. 주로 욕이지요.


대단한 사명감과 프로 의식이 없으면 축구 심판은 정말 못할 일입니다. 나름대로 소신껏 한다고 하는데 생명의 위협까지 느낄만한 일이 숱하게 생기니 말입니다. 이 경기 주심은 목숨이 적어도 세 개는 되나 봅니다. 전반 중반에 홈팀의 대표적 골잡이 미도 선수를 상대 진영 외곽에서의 애매한 반칙 한 번에 그냥 퇴장을 시켜 버렸거든요.


영어 욕을 다 배우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입니다. 사방에서 메가톤급으로 터져 나오는 욕, 욕, 욕, 그리고 음란한 몸짓. 비도덕적인 것으로부터 여성들을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여성의 경기장 출입을 막는다는 일부 중동 회교 국가의 처사를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는 순간입니다.


홈팀의 악재는 계속되었습니다. 원정팀 첼시의 골이 터졌거든요. 4년 전 써낸 책에서도 밝혔지만, 원정팀이 골을 넣으면 경기장은 오히려 조용해집니다. 그래도 골은 골이지 않느냐며 박수를 쳐 주는 홈팀 팬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긴 우리 팀 이기는 걸 보려고 그 비싼 돈 내고 경기장에 들어왔는데 우리 팀을 다 망가뜨려 놓는 상대팀에 박수를 쳐 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전에도 했던 얘기지만, 경기장 분위기만 보면, 원정팀의 골일 경우, 골이 들어간 걸 모르기 십상입니다.


이후 첼시는 한 골을 더 넣었습니다. 망연자실한 홈팀의 서포터들. 1-2위 팀의 대결이었지만, 실력차가 현저했습니다. 토트넘의 새로운 희망, 노장 다비즈의 분전이 있기도 했지만, 미도의 퇴장으로 오랜 시간 수적 열세 속에 싸운 데다가 양 팀 선수들 개인기의 총합이 객관적으로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원정팀 첼시의 완승이었습니다.


경기가 끝나기 전에 경기장을 떠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오랜 생각에 비추어 보면 이는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축구의 종주국에서... 하지만 영국 축구를 이해하는 사람은 압니다. 고액의 연간 입장권을 사 가지고 거의 매주 축구장을 찾는 이 사람들. 이들은 결코 도덕의 완성을 위해 축구장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스스로 싸우러 축구장에 와서 열심히 싸우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처를 입어 스스로 후송되는 중일 뿐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비난하는 당신은 다음번 이 자리에 와 있지 않겠지만, 저들은 반드시 이 곳으로 돌아옵니다.


축구 팬이기에 앞서 아스날의 골수팬이며 인기 작가인 닉 혼비는 출세작 '피버 피치'를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팬이 된다는 것에 대해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 한 가지는 이것이다. 겉보기와는 반대로 팬이 된다는 것은 대리 만족이 아니며, 구경을 하느니 직접 축구를 하겠다는 사람들은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축구를 보는 것은 결코 수동적인 활동이 아니며, 실제로 뛰는 것과 마찬가지다. (중략) 승리했을 때 느끼는 만족감은 그라운드의 선수들에게서 뿜어져 나와 창백하고 지친 표정으로 응원석 구석에 서 있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희석되어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느끼는 기쁨은 선수들이 느끼는 기쁨에서 뭔가 함량이 빠진 것이 아니다. 비록 골을 넣고 웸블리 구장의 계단을 올라 다이애나 황태자비를 만나는 것은 그들이지만 말이다. 이럴 때 우리가 느끼는 기쁨은 남의 행운을 축하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운을 자축하는 것이다. 재난에 가까운 패배를 겪고 나면, 우리를 집어삼키는 슬픔은 실은 자기 연민이며, 축구가 소비되는 방식을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무엇보다도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 돌아오는 길에


그러나 저러나 경기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어리석은 자들의 어리석은 작태를 봅니다. 첼시 유니폼을 입고 운전하는 사람을 향해 침을 뱉고 야유를 하는... '유럽 축구장을 10여 회 찾은 끝에 이런 일을 목도하기가 처음이기는 한데...'  


* 오늘도 '정체성'을 생각하며...


'열심히 뛰는 선수들을 격려해 주고, 멋진 플레이가 연출되면, 그것이 비록 상대팀 선수일지라도 마음껏 박수를 쳐 주자!' 오랫동안 들어온 공자님(?) 말씀입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구경이나 하다가 간혹 누가 봐도 멋진 장면이 연출될 때 마음껏 박수나 쳐 주는 일을 주로 삼을 생각이면, 우리나라에서 축구장에 나가 앉아있는 일은 대단히 비경제적인 일일 것만 같습니다. 90분 경기 중에 골은 몇골? 정말 멋진 장면은 몇번?


중요한 것은 축구가 진정 '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오랜 세월 '정체성'이란 이름으로 강조해 온 얘기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축구는 단지 (좋은) 구경거리가 아니라 필연적인 '삶'의 얘기요, '정체성'의 이야기여야만 합니다.


(2005년 여름, 유학 후 5년 만에 영국에 또 다녀오다.)




스포츠는 나와 구체적인 관계를 맺을 때 의미와 가치가 폭등합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박세리 이전과 이후의 골프, 김연아 이전과 이후의 피겨스케이팅을 떠올리면 이해가 빠르지 않을까요? 객관적 기술의 완성도, 아름다움과 같은 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들어가야, 정체성이 온전히 반영돼야 스포츠는 완전해집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초보 축구팬들을 위한 몇 가지 조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