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승돈 Sep 15. 2020

영어 잘하고 싶다

“What’s your mother’s maiden name?”
 
‘설마! 그럴 리 없어! 예금계좌 만드는데 은행원이 왜 우리 어머니 처녀 때 성(姓)을 묻겠는가? 외국인인 내가 잘못 들었겠지!’
 
하지만 내가 누구던가? 명색이 중등 영어 2급 정교사 자격증까지 가진 영어 전공자요, 용산 카투사 출신에 다른 나라도 아닌 영국 유학생이 아니던가? 토익 성적까지 밝히면 위화감이 극에 달할 테니 그건 그냥 지나가고.. 여하튼 ‘우리 어머니 처녀 때 성’을 묻는 게 맞긴 맞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왜?’ 난데없이 등줄기에 식은땀이 난다.
 
영어 아무리 잘해도 소용이 없다. 다 알아들어도 식은땀이 난다. 알아들은 게 맞기는 맞다. 은행원은 틀림없이 우리 어머니의 처녀 때 성을 물었다. 왜? 서양에선 여자들이 결혼하면 남편 성으로 성을 바꾸게 되는데, 결혼 전 원래 성은 본인과 직계가족 등 소수의 가까운 사람만 기억하는, 결국 비밀 아닌 비밀이 되고 만다. 이 같은 이유로 ‘mother’s maiden name’은, 우리나라에서 주민등록번호를 적는 것처럼, 보안 차원에서 각종 양식에 적고 또 활용하게끔 돼있다. 이를테면 비밀번호와 같은 구실!
 
영국이 아니라 독일쯤에서 영어로 수업을 듣고 논문을 쓴 뒤 학위를 받았다면, 모르긴 몰라도 비교적 적은 심리적 부담에 영어가 훨씬 더 늘었을 것만 같다. 나보다 영어를 못하는 사람도 많고, 혹 나보다 영어를 잘하더라도 ‘저 사람은 나보다 두 배, 저 사람은 세 배쯤 잘하는 것 같다’는 식으로 견적이 가능하지 않았을지? 그러나 영어의 종주국 영국에서는 주변 모든 사람들이 나보다 영어를 무한대로 잘하다 보니 주눅이 들어 도무지..
 
'그런데 영어는 참 신비하기도 하지!' 심리적으로 무너진 내가, 난 단지 바빠서 못하는 척하며 나보다 영어를 훨씬(?) 못하는(?) 것으로 돼있는(!) 아내에게 이런저런 부담스러운 일을 맡기고 집을 나갔다 돌아오면, 아내는 그것도 그 어렵다는 전화영어로 대부분의 일을 매우 잘 처리해 놓고 있는 것! 결국 잘한다고 내내 우쭐할 일도 없고 못한다고 영 주눅 들 일도 없다는..
 
평생 영어 한 마디를 안 하고도 잘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원어민만큼 하지 않으면 못 배기겠단 사람도 많다. 난 이왕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가능하면 끝을 보자는 것이고.. 하지만 시간이 흐른다고 끝이 보이는가? 혹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앞바다를 향해 삽질해 들어가기? ‘뭐? 우공이 산을 옮긴다고?’
 
논리는 차치하고 힘들고 지치니 그냥 ‘힘들다’고 하자. 애초부터 푹 쉬고 있던 사람만 아니라면 ‘괜찮다’고 믿으며 좀 쉬자. 영어로부터 잠시라도 자유해 보자. 괜찮다. 다시 영어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도 이 자유는 꼭 필요하다. 평안하라. 등줄기에 흐르는 식은땀은 그리 쉽게 멈추지 않는다. 떨어져 조각난 자신감을 한데 주워 모으자. 독일에서 독일어 한마디만 해도 들을 수 있는 엄청난 칭찬을 떠올려볼 때 당신의 영어는 이미 과도하게 훌륭하다.
 
‘원어민처럼 영어 하기’는 영어교육 이론 중 벌써 오래 전에 폐기된 목표다. 오늘날엔 기능적 관점에 입각해 ‘비영어권 사람들이 기존 모국어 사용환경에서 무난히 감당해내던 각종 구실을 영어 사용환경에서도 얼마나 근사하게 감당해낼 수 있게 할 것이냐?’는 다소 소극적인 내용을 그야말로 현실적 목표로 제시해 놓고 있는 상황이다. 당신 같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영어교육, 요즘 매우 흔히 듣게 되는 ‘TESOL’이라는 것도 그냥 ‘teaching English’가 아니라 ‘teaching 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s’, 즉 ‘영어 말고 다른 말을 일생 쓰고 사는 사람들을 위한 영어교육’으로 특화돼 있는 것임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원어민과 비원어민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게 어차피 다르단 얘기.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면, 일단은 좀 섭섭하기도 하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능히 감사할 수도 있는 일. 비용과 효율을 따지면 감사하는 게 훨씬 낫다. ‘어차피 그렇고 또 그런 것인데 이 정도면 매우 훌륭하다는..’
 
일단 마음의 평안함을 얻은 뒤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다시 돌아가라. 이 소중한 마음의 평안함을 애써 지켜내는 가운데 숭고한 노력을 더욱 경주하라. 그리하면 주어진 운명과 함께 했던 그 섭섭함, 아니 그 운명의 굴레마저 오히려 넘어서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 힘들면 돌아보라. 말보다 더 소중한 우리의 아름다운(?) 삶을..




어지간히 배웠으면 공부 그만하고 실컷 쓰며 살라. 된다.

Stop learning. Just go for it. You've already got what it takes.

매거진의 이전글 일어, 그렇게 쉽지 않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