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여행 중 전철역 근처 어느 우동집에서 메뉴판을 천천히 훑어본 뒤 꼭 먹고 싶은 걸 주문하겠다고 마음먹고 한 줄 한 줄 꼼꼼히 메뉴를 읽어본다.
“데—음 후, 아니 뿌, 그리고.. 라? 뎀뿌라? 애써 공들여 읽은 게 기껏 뎀뿌라?”
익숙한 부분이 많고 적당히 단어 바꿔치기만 해도 말이 되는 느낌이 있는 가운데 초반 진도가 상상 이상으로 빠를 뿐, 일어는 결코 생각만큼 쉽지 않다. 우선 글자가 너무 많다. 자그마치 50(!) 음도를 빽빽하게 장식하는 일본 글자, 가나는 일단 히라가나 한 세트에 가타가나 또 한 세트! 게다가 때마다 읽는 방법이 다른 한자까지..
그래도 5과 혹은 10과까지 진도는 비교적 신나게 나간다. 하지만 ‘-い’로 끝나는 형용사와 ‘-な’로 끝나는 형용사의 각기 다른 활용에 슬슬 헷갈리기 시작하고, ‘이치(1), 니(2), 상(3)..’ 수준의 기초지식만으로는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 ‘히토츠(하나), 후타츠(둘), 밋츠(셋)..’, ‘히토리(한 사람), 후타리(두 사람), 산닌(세 사람)..’ 문제! 여기에 줄줄이 외워줘야 하는 날짜, 요일, 가족관계 등등등.
“으아!”
뜻이 있는, 이른바 ‘실사’를 외워주는 건 별로 억울하지도 않고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문제는 문법적 기능만 할 뿐, 별 뜻이 없는 ‘허사’다. 일어는 우리말과 같은 어족에 속해 있어서 많은 공통점을 갖는데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어미, 조사 등 각종 허사의 존재다. 문제는 ‘-은/는, -이/가, -을/를, -도, -만, -(이)다, -(이)ㅂ니다, -(이)ㅂ니까, -(이)지만, -(이)므로..’에 해당하는 임의의 일본어 허사를 죄다 외워줘야 한다는 사실! ‘허사’다!
이 같은 이유로 다채로운 어미가 마구마구 등장하는 동사 활용에 이르러서는 손님 발길이 으레 뚝 끊어지고 마는 것이 바로 일본어 장사다. 하지만 이쯤에서 쉽게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초급 책 한 권을 떼내고 마는 훌륭한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또 시작! 일본인이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중급 이상의 일어는 마치 새로운 언어인 양, 초급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私(わたし, 와타시)’, ‘あなた(아나타)’를 ‘나’, ‘너’로 알고 악착같이 외워 쓰고 있는데, 정작 일본 사람들은 실생활중 ‘와타시’, ‘아나타’를 별로 쓰지 않는다는 둥. 일본 사람과 친해지려면 반말을 따로 배워야 한다는 둥. ‘どうですか?(도오데스카?, 어떻습니까?)’를 기껏 외워 쓰는데, 비슷하지도 않은 ‘いか-がですか?(이카-가데스카?, 어떻습니까?)’는 또 무엇이며, ‘あります(아리마스, 있다)’, ‘います(이마스, 있다)’도 충분히 헷갈리는데 더욱 공손한 표현이라는 ‘ございます(고자이마스)’는 또 웬 말?
일본 출장을 가서 혼자 신요코하마를 찾아가야 했을 때였다.
“私(나), 新横浜(신요코하마), どう(어떻게)?”
대답을 완벽하게 알아듣는 것은 애초에 포기한 일이었지만, 나는 그래도 대충 알아들은 대답 덕택에 전철을 틀리지 않고 두 차례나 갈아타며 비교적 수월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제대로 하려면 어떤 언어든 한이 없겠지만, 그래도 역시 일본어가 가장 건들기 쉽고 효과가 쉽게 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