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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돈 Apr 22. 2021

발음이 중요하다

고등학교 때 학교에서 2년 배우고 독일문화원에서 초급과정을 한 번 수강한 이래 거의 제대로 돌보지 않은 독일어. 그래도 우리집에서 독어 실력을 따지면 결혼 후 십수 년 동안 1위를 달렸는데, 딸이 외고 독일어과에 진학하고 난 뒤 2위로 떨어졌고 다시 올라갈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독일어는 발음이 쉽다고 생각한다. 정확히 말하면 철자와 발음의 관계가 매우 규칙적이어서 일단 법칙을 깨우치고 나면 뜻을 몰라서 그렇지 글을 읽는 데는 거의 지장이 없다는 것. 하지만, 우리 딸이 늘 지적하듯 원어민의 발음과 내 발음이 도무지 비슷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내 발음이 지극히 1차원적인 도식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제2외국어에 도무지 관심을 갖지 않는 아이들이 그것만 제대로 익혀 줘도 감지덕지기는 하겠지만..
 
영어나 독일어에는 우리말엔 없는 강세라는 게 있는데 이게 발음에 미치는 영향이 생각보다 훨씬 크다. 다행인 건 영어와 달리 독일어의 경우 단 몇 줄로 정리되는 강세의 규칙이 있어서 관심을 좀 가지면 생각보다 빨리 익숙해질 수 있기도 하고.. 그런데 본격적인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강세가 있는 음절은 기초과정에서 배운 규칙대로 발음하면 된다. 하지만 문제는 강세가 없는 음절.
 
영어 음성학에 '모음약화규칙(Vowel Reduction Rule)'이라는 게 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강세가 없는 음절/모음은 중립 모음(영어의 경우 [ə])으로 약하게 발음한다'는 것. 예를 들어 'America'의 경우, 우리말로 쓰면 '아메리카'지만, 강세가 있는 '메'만 원래 음가대로 발음하고 단어 전체를 '어메러커'로 발음하면, 처음엔 좀 어색하겠지만, 원어민의 현실 발음과 훨씬 가까워지게 된다는..
 
영어에 이런 규칙 혹은 요령이 있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비슷한 규칙이 독일어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이 와중에, 원어민이 강세 없는 어미를 발음할 때는 뭉뚱그려서 대충 다 비슷하게 발음하는데, 외국인들은 상황에 따라 어미를 정확히 구별해 쓸 줄 아는 걸 쓸데없이 애써 보여 주려다 오히려 원어민 발음과 더 다르게 되고 또 영 어색해지곤 하고..
 
내 발음이 원어민과 많이 다르면 그건 그것대로도 큰 문제지만, 원어민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기도 어렵게 되니 이것 또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유아든 외국인이든 말을 배우는 첫 단계는 어른의 말, 원어민의 말을 계속 듣는 것이다. 그런데 발음에 대한 이해가 기본적으로 잘못돼 있으면 아무리 들어도 들리지 않기 때문에 제대로 된 학습은 이뤄지지 않고 피로만 쌓이기 마련이라는.. 그래서 대부분 시작 직후 이내 포기.
 
발음은 '나이 먹어 안 되는 것', '어차피 안 되는 것'으로 치고 적당히 지나치려는 경향을 흔히 보지만, 모든 언어의 근본인 음성언어에 대한 이해요 기본틀로서 갖추게 되는 발음에 대한 체계적 지식은 외국어라는 저수지에 물을 대는 큰 파이프와도 같아서 이것이 부실하면 제대로 된 시작도 이렇다 할 성과도 도무지 기약할 수 없게 되고 만다.
 
요즘은 이른바 주요 언어가 아니더라도 원어민의 발음을 직접 들을 수 있는 방법이 많다. 별 효과도 없이 추상적인 규칙을 많이 되뇌기보다 현실 언어에 마구 노출되고 부딪히는 적극성이 필요하다. 생각보다 잘 안 된다. 외워서라도 해 보려는데 외우자니 한이 없다. 괜찮다. 익숙해지는 거다. 걸음마도 그렇게 익혔다. 몇 달 전보다 조금만 더 익숙한 느낌이면 된다. 좀 있으면 확 빨라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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