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던 교회에 사달이 나고 + 몇 년 뒤 + 그 교회를 떠나며..
오른쪽을 살펴 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시편 142:4~5)
우리 교회는 기성 교회의 타성으로부터 도망한 난민들의 교회다. 불편했지만 새로움과 순수함이 주는 활력이 우리를 들뜨게 했고 신앙과 삶을 은혜롭게 이어가게 했다.
지금은 큰 시험중! 힘들 때 힘들더라도 난민들의 희망캠프가 사라지지 않으면 좋겠다. 여기서 또 쫓겨나면 우린 또 어디로 가란 말인가?
탈북자들을 다시 북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참으로 비인도적인 처사다. 그 자체로 즉결심판을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혹 당장 죽지 않는다고 해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음이 분명하지 않은가?
우리의 신앙을 온전히 유지하기 참으로 어려운 상황과 조건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다면, 이건 정말 잔인하고도 잔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주님 우리가 완전히 실족하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은 나의 피난처이십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특정 개인에 의해 빚어진 물의에 대해 변호하지 않는다. 크든 작든 문제는 명백한 걸로 안다. 그러나 이 문제로 인해 다른 모든 일도 다 잘못된 것이라 여겨서는 안 된다. 여전히 귀하고 소중한 것이 대단히 많다.
겪지도 않은 일을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다. 적잖은 곡해도 있다. 있는 활력을 뒤로한 채 없는 문제를 넘어서고 해결하겠다는 모습도 본다.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애써 떠나온 옛것의 모습을 또 본다.
남아야 할 게 많이 남아 있지 않고 많은 게 달라졌다. 따라서 우려 또한 새롭다. 사용되는 단어는 혹 고울지언정 추상적이다. 구체로의 상승은 요원한 느낌이다. 실은 잘 맞지도 않는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적당히 거룩하고 착한 척? 그것도 그 나름 귀한지 모르겠지만 절대 힘써 추구할 바는 아니다.
좋은 편을 택하여 누리고 알아 빼앗기지 않으려는 이들 앞에 겸손해야 한다. 비둘기처럼 순결하되 뱀 같이 지혜로워야 한다. 정확한 판단과 세밀한 전략 없이, 각기 다른 곳에서 구경이나 해 본, 이전 수준, 이전 방식의 어설픈 경험만 고집하면, 결국 또 다른, 큰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이제 내가 아는 사람은 적고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그런데 내가 모르는 사람끼리는 서로 꽤 잘 아는 것도 같다. 주님만 알기 더 좋은 조건일 수도 있겠다.
주어진 조건과 맺어진 관계를 함부로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각기 받아 간직한 뜻이 진정 선함을 믿고 오히려 감사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힘 있게 서기까지 충실한 증인이요 묵직한 자극이 되고자 한다.
말하자면 너무도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더 나쁜 때도 많지 않았나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려 보려 하지만 마음을 다스린다는 게 어디 또 그렇게 쉬운 일인가? 본의든 본의 아니게든 큰 욕심 없이 길 비켜 주는 인생을 산다고 하는 것 또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이 나이 먹어 만사가 혼란스럽고 또다시 모든 것이 궁금해지는 것은.. 이 와중 현실 교회가 스스로 답이 되거나 일정한 답을 제시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크고 어려운 문제가 되어가고 있음을 현장에서 목도하고 체험해 더욱 잘 알고 있다면..
삶과 신앙의 본질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억지로라도 기뻐하자. 무슨 주문과도 같은 '주여!'를 애써 외치고 시끄럽게 기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만히 그분 생각을.. 이게 맞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