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팬데믹의 시작으로 여러 방면으로 나에게 최악의 해였다. 기존의 많은 것들을 잃어가는 느낌, 행복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들로 갇혀서 깊은 늪으로 빠지고 있었다.
그런데 한동안 심연의 우울감과 자기 비관으로 점철되어보니 보니, 저 깊은 반대편에 서 있는 나의 이면이 보이기도 했다. 한없이 우울하다는 생각들은 체념하는 것이 아닌 어쩌면 반대로 강한 욕망이 있는 것이 아닐까.
'행복'이라는 단어는 흔하지만 막상 그 개념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낯간지럽게 여겼고, 세상에 가득한 행복 담론들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나약한 위로 같다고 느낀 적이 있었다.
세상만사를 권태롭고 삐딱하게 바라보던 그 해에 '주관적인 욕망과 행복감'이라는 것에 포커싱하게 됐다.
행복과 욕망
가장 우울감이 심한 시기를 겪으며 알게 되었다.
‘행복감’이라는 것은 객관적인 조건이 아니고, 얼마큼 내가 행복으로 느낄 수 있을까- 라는 주관적인 마음의 상태로 결정된다는 것을.
이제는 행복감을 느끼는 일은 그저 안일한 위로를 향한 도피 같은 것이 아닌, 엄청난 재능이라는 것을 안다. ‘이것’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없어도 편안한 마음 상태를 유지하고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능력이기 때문이다.
'이것'이라는 것이 없으면 행복해지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새로운 자극 혹은 물질적은 것들로 일시적으로 행복감이 충족되기는 하지만 이것들을 위해 투자한 시간과 비용에 비해 행복감의 유효기간은 짧고, 갈수록 짧아진다. 이전과 같은 밀도의 행복감을 느끼려면 더 새로워야 하고 노력도 들여야 한다.
건강하지 못할 때에는 건강이 조금만 좋아지면 정말 행복해질 거 믿는다. 하지만 막상 어느 정도 건강해지고 나면 행복감이 찰나처럼 스쳐 지나가지만 이내 다른 새로운 조건들을 필사적으로 행복해진다고 믿는다. 육아도 마찬가지로, 아이가 어릴 때에는 제발 이 만큼만 자라주고 스스로 해준다면 행복해질 거 같지만 그만큼이 이루어지면 또 다른 바람과 욕심이 생긴다.
그런데 행복과 욕망은 또 다른 성질이다.
욕망을 충족하는 것과 감정적으로 행복해지는 것은 비슷한 듯 다르고, 특정 조건들을 갖추느냐 마느냐와 상관없이 내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별개의 능력이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과 행복감을 느끼는 일은 다른 축의 일이기 때문에 욕망은 욕망대로, 행복은 행복대로 충족해 나가는 것이 맞는 것이다.
나는 매우 운이 좋게도 내 곁의 사람들은 이 두 개념을 잘 알고 행복을 잘 느끼고, 나에게 선하고 긍정적 영향을 주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내가 부족한 부분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그러한 사람들로 채웠으리라 생각된다.
‘당연한 것들의 소중함’을 자주 떠올리는 이유도 자꾸만 망각하기 쉽고 어려운 일이기에 스스로에게 각인하기 위함이다.
욕망은 욕망대로 최대한 노력해서 추구하는 근력도 필요하고 행복은 그대로 너그럽게 감지하는 촉도 필요하다. 즉, 욕망을 위해 행복을 포기할 필요도, 행복해지기 위해 욕망을 포기할 필요도 없다.
- '자유로울 것' 임경선 작가
며칠 전에는 또 한 번 매우 복잡한 마음과 마주하며 머릿속에서 지옥을 경험했다.
기록의 가장 좋은 점은, 과거에 괴롭거나 무력했던 일을 복기하며 비슷한 상황이 생기더라도 나만의 공식으로 나의 상태를 판단하고 예전보다는 빠르게 빠져나올 수 있다는 점인 거 같다.
예전과 같이 감정 블랙홀처럼 빨려 함몰되지 않고, 기억이 떠올랐을 때에 정리하며 마음의 근력이 길러지고 말끔히 흘러 보내 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마치 그네에서 가만히 있는 나의 등을 한번 탁- 밀어주며 다시 앞으로 걸음을 디딜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