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승하이팅 Nov 23. 2020

영화 속 맥주 한 장면 - 06 블루 재스민

불행을 느끼게 하는 것은 불행의 강도가 아니에요


 블루 재스민. 케이트 블란쳇이란 배우를 이 영화를 통해 처음 만났고 10명이 채 되지 않는 소수의 관객들이 극장을 채운 기억이 난다. 모두 듬성듬성 좌석을 띄어 앉았고 덕분에 주로 앉는 H~K 열 어디쯤 자릴 잡았겠지.


그땐 이렇게 혼자 영화 보고 남들이 잘 모르는 영화 찾아보기가 작은 행복 같은 것이었다. 콜라를 움켜쥔 손 사이에 빳빳한 티켓을 집어넣고 터벅터벅 영화관으로 들어가 관객이 몇 없는 조용한 극장 안 공기를 한 번 들이마시는 것. 새삼 뿌듯하고 멋진 문화인이 된 듯했다.


요즘은 혼자 영화를 본 기억이, 아니 영화관을 편히 간 기억조차 까마득하다. 7년 만에 이번엔 방구석에서 블루 재스민을 보며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에 또 한 번 감탄하고 영화 곳곳 보이지 않던 것들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라구니타스 IPA! 샌프란시스코 위 페탈루마에 라구니타스 양조장이 있는데 여기서 만날 줄이야.



- 뭐 마시는 거예요? 보드카?

- 마티니



어떤 사람들은 지난 과거를 잊지 못한다. 호화로웠던 과거와 달리 내 인생이 바닥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경우라면 지난 습관을 털어내고 금방 일어서기란 좀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이동진 평론가님은 말했다. 불행을 느끼게 하는 것은 불행의 강도가 아니라 행복했던 순간과 불행 사이의 낙차라고. 인생의 최고점에 있다 바닥으로 추락한 재스민의 불행에는 속도가 붙어 땅으로 뚫고 들어갈 지경이었다.


그녀는 영화 내내 우아하고 호화로웠던 과거를 놓지 못한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동생 진저네 집에서 신세를 지는 처지임에도 루이뷔통 여행 가방을 들고 1등석을 타고 온다거나, 샤넬 트위드 재킷과 에르메스 버킨백을 분신처럼 들고 다닌다거나. 음식점에서나 스포츠 경기를 볼때 동생과 주변 사람들은 맥주를 권하며 그녀와 친해지길 원하지만 영화 끝까지 재스민은 맥주를 마시거나 그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


명품백, 와인, 진. 늘 마시고 입던 것들은 본인을 지키는 보호막이자 최소한의 품위 같은 것이다. 하루빨리 내 인생을 회복시켜줄 남자를 만나 다시 꼭대기로 가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말이다.



출처 Youtube 헤더의 터닝 페이지


현재와 과거 사이를 불안하게 달려가던 그녀는 마지막 씬에서 와장창 무너져 버린다. 분신 같던 에르메스 버킨백은 어디 가고 젖은 머리에 초점을 잃은 채로 걸어가며 뒤섞인 과거를 읊조린다. 심지어 줄줄 꾀던 '블루문'의 가사는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내 삶의 여러 가지 지지대를 만드는 것은 중요하다. 무너질 것 같은 순간에 나를 지탱해줄 무언가가 없을 땐 회복하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상류층에서의 행복 외에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여러 사소한 행복들을 만들어 왔다면, 타인에게 의지하며 내 인생을 환골탈태하려는 것이 아닌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법을 조금씩 터득해왔더라면. 그녀는 추락의 순간에도 일어설 수 있는 방법을 찾지 않았을까?


블루 재스민을 보며 내 지지대는 안녕한가, 놓치고 있는 건 없었는가 다시 한번 곱씹고 두드려본다. 무엇보다 홀로 조용한 극장 안 공기를 들이마시며 뿌듯함과 행복을 느꼈던 순간을 곧 만날 수 있길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속 맥주 한 장면 - 05 그랜 토리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