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Beer Brings People Together
어떤 걸 봤을 때 불현듯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함께 있지 않아도 잠시나마 그 사람과 머물 시간을 만들어주니 말이다. 포틀랜드에 머무는 동안엔 이렇게 함께 있지 않아도 그 순간 머물다 간 사람이 많았다.
엄마의 얼굴
포틀랜드에서의 이틀 날. 맥주 투어를 하기에 앞서 워싱턴 파크에 있는 Rose Test Garden에 들렀다. '장미의 도시'라고도 불리는 포틀랜드에서 이곳은 필수 코스라고들 한다. 날씨가 화창한 탓인지 5-6월이 절정임에도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빨갛고, 노랗고, 또 새하얀 형형 색색의 장미꽃들. 그 앞에서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고 있는 한 여자아이와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어휴. 엄마는 꽃은 무슨. 엄마 그런 거 안 좋아해!"
셋째 언니 웨딩 촬영 당일날, 촬영 소품으로 준비된 부케를 받아 든 엄마는 말했다. 잠시 내가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더니 평생 꽃이라곤 들여다볼 일도, 또 좋아하지도 않는다며 손사래 치던 엄마였다.
"아냐. 엄마 진짜 예뻐!"
그 말에 그래? 하며 슬며시 벽에 기대어 미소를 띠던 엄마의 모습은 수줍은 소녀 같았다. 몇 장 사진을 찍고 있으니 엄마는 장미꽃이 배경으로 난 자리에 서서 이 모습도 찍어달라고 하셨다. 옆으로 서서 손을 모으는 모습,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 이리저리 포즈를 취하며 미소 짓는 엄마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우리 엄마. 천생 여자였네."
그러고 보니 엄마는 꽃을 좋아하지 않은 게 아니라, 꽃을 들여다볼 여유조차 없던 지난 세월을 지내왔을지도 모르겠다. 엄마랑 여기 왔으면 정말 좋아했을 텐데. 나도 저 모녀처럼 엄마 사진을 예쁘게 담아 줄 수 있는데. 혼자 이 순간을 누리고 있자니 괜히 또 미안해져 장미꽃을 카메라에 잔뜩 담았다. 다음번엔 이 자리에 선 엄마의 미소가 담겨있길 바라며.
친구의 얼굴
Rose Garden에서 나와 다운타운으로 향해갔다. 화사한 꽃들을 본 탓인지 내리막길이 계속된 탓인지 다운타운으로 향하는 내내 페달이 가벼웠다. 혼자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다 보니 어느새 10 Barrel Brewing 앞에 다다랐다. 2층 건물인데 위층은 야외 테라스처럼 되어있어 오늘 같이 볕이 드는 날 쉬어가기 좋을 듯했다. 나는 자전거를 입구 앞 기둥에 묶어두고 실내로 들어섰다.
북적거리던 실내는 다른 곳에 비해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공간인 듯했다. 널찍한 내부에 목재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천장에는 은색 파이프로 꾸며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세련된 느낌. 요즘 한국에서도 흔히 찾을 수 있는 카페 인테리어와 비슷하기도 했다. 바에는 빈자리가 없었던지라 바를 마주 보는 긴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직원이 다가왔다.
여기에선 10개의 샘플러 세트를 꼭 마셔봐야 한다는 지인의 말이 있었기에 1초의 고민 없이 샘플러를 주문했다.(여긴 샘플러는 무조건 10개가 1세트이다) 주문을 받아 들던 직원은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는데 그 의미를 그땐 알아채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 샘플러 10개라 봤자 얼마나 되겠어. 아 설마. 모자라는 거 아니야? 마시고 더 시켜야지.라는 생각은 샘플러가 내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크나큰 자만이었음을 알게 됐다.
‘헐. 이 많은 걸 어떻게 다 마셔.’
그러고 보니 이 샘플러 한 세트로 나홀로 전쟁을 치르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았다. 다들 2명 혹은 3명이서 함께 나눠마시고 있거나 간혹 혼자 마시는 사람들은 바에 앉은 남자들 몇 분. 그들은 정말 마니아이거나 나처럼 아무 생각 없이 도전한 사람일지도.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번호가 적힌 순서대로 맛을 보기 시작했다. 한 두 개를 제외하곤 전체적으로 맛이 괜찮았다. 그중에서 saison과 IPA를 맛있다고 동그라미 쳐두고 가장 먼저 잔을 비웠다. 그렇게 천천히 맥주를 들이켜다 보니 6잔이 넘어갈 때쯤엔 점점 시험 치는 기분도 들고, 맛도 네 맛이 다 네 맛 같은 게. 이를 함께 마셔 줄 구원투수가 있었으면 싶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니 삼삼오오 모여 맥주를 나누는 이들의 모습이 더 눈에 들어온다.
맥주라면 나만큼 난리가 나는 친구가 있는데. 에이. 그 친구가 여기 왔다면 우리가 저 사람들보다 더 신나게 놀고 있을지도 몰라. 지금쯤 1인 1 샘플러를 마시고도 모자라다며 더 시키자고 직원을 향해 손을 들었겠지. 그렇게 밤새도록 맥주에 취해 포틀랜드 시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역시. 이렇게 맛있고 다양한 맥주도 혼자 마시니까 재미가 없다. 다음번엔 꼭 같이 오자 친구야.
그 모두의 얼굴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데슈츠 브루어리(Deschutes Brewery). 1988년 오레건 주의 밴드(Bend)에서 시작된 이곳은 포틀랜드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브루어리 중 한 곳이다. 그래서인지 풍기는 아우라가 남달랐다. 신생 브루어리의 파릇파릇하고 진취적인 느낌보다는 고향을 방문한 듯 편안하고 오래 묵은 느낌이었다. 규모도 굉장했다. 연예인으로 비유하자면 오랜 연기 경력의 내공을 가진 30대의 연기파 배우 느낌이랄까. 앞서 방문한 10 barrel brewing과는 아주 상반되는 느낌이었다.
포틀랜드의 관광 명소답게 웨이팅이 많았으나 난 혼자여서 바로 자리를 안내받을 수 있었다. 널찍한 내부는 다소 동양적인 느낌의 인테리어에 패밀리 레스토랑 같았다. 관광객, 현지인 상관없이 많은 이들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는데 가족단위로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 친구와 맥주를 나누는 사람들, 나처럼 혼자 맥주를 마시러 온 사람들. 모두 각양각색이었다.
실제로 포틀랜드는 이렇게 어른, 아이, 노인 할 것 없이 다양한 연령층이 함께 브루어리를 찾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가족, 이웃 등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여유롭게 즐기는 삶의 질에 초점을 두는 포틀랜드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런 브루어리에서 맥주만 마시고 즐기기보다 가족 구성원이 오랜 시간 음식을 먹으며 천천히 쉬었다 간다. 때문에 브루어리에서도 로컬 음식들을 사용한다던가, 친환경 재료를 사용한다던가. 맥주만큼이나 음식에 굉장한 공을 들일 수밖에 없다.
아침부터 빈속에 맥주를 들이켜 온 터라 끼니를 해결할 겸 더블 머쉬룸 햄버거를 주문했다. FreshSqueezed IPA도 함께.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먼저 서빙된 IPA. 붉고 짙은 호박색에, 얕게 깔린 헤드. 한 모금 마시자 마치 요리왕 비룡에서처럼 내 머릿속에 '미미'가 지나다녔다. 그 맛은 마치 이름처럼 홉과 감귤과 자몽들을 입 안 가득 짜낸 느낌이랄까?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여름날, 비치에 앉아 쭉 들이키면 잘 어울릴 것 같은 맥주. 굉장히 쥬시 하고 맛이 좋았다. 음식이 나오기 전에 다 마셔버리면 어쩌나 싶어 남은 맥주는 홀짝홀짝 들이켰다.
이곳은 음식도 훌륭했다. 곧이어 서빙된 햄버거조차 정말 맛있었다. 맛있는 걸 먹고 행복해진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양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나 홀로 두둥실 떠있는 기분이었다. 흐뭇하게 고개를 흔들고 있으니, 담당 직원이 물었다.
"맛이 괜찮아?"
"정말 최고예요!"
지금 생각해보니 혼자 감탄하던 내 모습이 조금 웃긴 것 같기도 하고, 연이어 맥주를 마신 탓에 점점 취해가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데슈츠 브루어리는 음식이며, 맥주며, 분위기까지 삼박자가 골고루 갖춰진 곳이었다. 많은 사람이 찾아 바쁜 와중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던 직원의 서비스까지. 친구들과 함께 찾아도, 가족들과 함께 찾아도 모두가 만족스러워할 그런 곳이다. 남은 맥주를 마시려고 잔을 들었는데 아까는 보이지 않던 코스터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GOOD BEER BRINGS PEOPLE TOGETHER
그러게. 이 장소, 이 분위기에 딱 어울리는 메시지다.
좋은 맥주는
여기 있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그 순간 함께 하도록 만들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