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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하이팅 Aug 11. 2017

[제 15 잔] 잠시 멈추어 섰을 때 알게 된 것들

Rogue Ales & Spirits

찰칵-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 보면 매 순간 아름다운 풍경들을 마주한다. 하지만 늘 그 장면을 사진으로 찍겠다고 멈춰 서진 않는다. 그저 눈으로 담아내고 싶다는 마음도 있지만 페달이 한창 탄력을 받다가 멈춰 서면 다시 탄력을 받을 때까지 힘과 시간이 배로 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자리에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뉴포트(Newport)를 10km쯤 남겨두고 오르막길을 힘겹게 오르고 있었을 때였다. 얼굴과 등줄기엔 땀이 줄줄. 이미 내 정신은 육체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오른쪽 두시 방향으로 떠있는 햇볕은 왜 그리도 따가운지.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휙 돌렸는데 그 순간 으악 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뜨겁게 내리쬐던 햇빛이 파도에 알알이 부서지니 유리알처럼 반짝반짝. 저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 너머의 끝은 어디인지. 상상 꾸러미를 펼치게 만드는 그 장면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 것이다. 세상 다 가진 기분이다라는 표현은 바로 이럴 때 쓰는 게 아닐까.      


체력적으로 힘든 순간이 많지만 이런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그래. 이 맛에 자전거 여행을 하지. 싶다. 자동차나 기차로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부분들에 멈추어 설 수 있다는 것. 이렇게 두 눈에 담아 내 것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 느리지만 내 힘으로 달려가는 자전거 여행의 큰 장점이기도 하다. 그렇게 오르막길에서의 힘겨움은 잠시 잊은 채 혼자 감상에 젖어들고 있었다.                            




이 포인트에선 쉬는 게 맞아    



이 구간은 라이더들이 유난히 많았는데 그때 로드 자전거를 타고 올라가던 한 아저씨가 내게 말을 건넸다. 이렇게 종종 길 위에서 마주하는 인연은 짧게 스쳐 지나가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서로의 먼 미래까지 이야기를 나누며 깊은 사이가 되기도 한다. 이 아저씨처럼.      


"그래. 넌 어디서 왔니?"

"한국에서 왔어요!"

"오! 어디서부터 시작한 거야?"

"시애틀부터 시작했고 샌디에이고까지 갈 예정이에요."

"말도 안 돼! 설마 혼자서? 대단해!"     


사실 대단한 여행을 하고 있다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말해줄 때마다 이게 새삼 대단한 여행인가 싶기도 하다. 별로 특별할 것 없는, 그냥 남들처럼 똑같이 여행을 다니며 맥주를 마실 뿐인데 말이다. 아저씨는 뭐 이런 애가 다 있지 하는 표정으로 계속해서 질문을 했다.     



"왜 이렇게 여행을 하고 있는 거야? 그것도 한국에서 오다니!"

"저 맥주 여행 중이에요. 특히 미국 크래프트 맥주에 대해서 알고 싶었거든요."

"오 마이 갓. 크래프트 맥주 여행이라고? 나도 크래프트 맥주 광이야. 난 Bend에서 왔어! 데슈츠 브루어리가 시작된 곳이지! 종종 주말마다 차를 들고 와서 라이딩을 하고 다시 돌아가. 오늘은 어디에서 머무니?"

"Newport에 있는 사우스 비치 주립 공원에서요."

"그래? 나도 근처 바이크 샵에 차를 두었어. 거기 Rogue Brewery가 있는데 맥주를 꼭 맛보길 바라!

아! 이름이 뭐야? 난 John이야."

"seungha예요. 그냥 Ha라고 불러주세요. HaHaHa.,,,(방긋) 기억하기 쉬울 거예요!"

"그래 Ha!! 네 이야기는 내게 동기 부여가 되었어. 고마워. 행운을 빌어"     



그렇게 인사를 끝내고 다시 언덕을 오르는 듯하던 John은 얼마 못가 다시 되돌아왔다.    


  

"Ha. 혹시 너만 괜찮다면 이야기를 더 나눠보고 싶어. 네 맥주 이야기가 궁금하거든.

나는 4시쯤 차를 타고 Bend로 돌아갈 건데 그전에 Newport에 도착한다면

바이크 샵에서 만나자."     


나는 흔쾌히 좋다고 했고, John은 그 자리를 먼저 나섰다. 여전히 같은 무게에 오르막길을 올라야 했지만 어쩐지 전보다 페달이 가볍다.           


그렇게 3시쯤 약속한 장소에서 다시 John을 만났다. '맥주'라는 공통 관심사가 있었던 우린 Yaquina Bay Bridge를 건너서 바로 왼쪽 편에 있는 Rogue Ales & Spirits으로 향했다. 오늘 머물 주립 공원에서도 10분밖에 되지 않는 거리였으니 맥주를 마시고 캠핑장에서 하루 머물다 가기에 이만큼 최적의 장소도 없었다.                      


Rogue Ales & Spirits의 규모는 상당했다. 브루어리뿐 아니라 펍, 레스토랑이 함께 운영되고 있었으니 말이다. 여길 찾는 손님들도 그 규모만큼 많았는데 아마 이 중의 절반은 나와 비슷한 여행자들로 보였다. 사람이 많은 탓에 우린 웨이팅을 걸어두고 굿즈가 진열된 곳에서 잠시 대기를 하고 있었다. 다양한 전용잔들과 특이한 탭들까지.  잔뜩 사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두고 이것저것을 둘러보고 있는데 John이 카운터에 서있는 직원들에게 내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이 친구는 한국에서 왔어! 크래프트 맥주 여행을 하겠다고 말이야! 자전거를 타고 샌디에이고까지 간데. 오늘은 맥주를 맛보겠다고 이곳에 왔지. 믿기지 않아! 어떻게 이렇게 달릴 생각을 하지? 그녀는 미친 게 분명해!"      

오히려 나보다 더 신이 나서 말을 하던 그였다.      


자리에 앉은 후에도 마주치는 직원들마다 그렇게 내 소개를 했다. 나는 그 사소한 배려심이 참 고마웠다. 그만큼 나와의 인연을 소중하게, 또 내가 이 자리와, 이 사람들에 빨리 스며들 수 있도록 신경 써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어제 먼저 이곳을 찾았다던 John은 Good Chit Pilsner를, 나는 샘플러 4잔을 주문했다. 이곳은 Voodoo Doughnut 브랜드의 도넛에서 착안한 맥주 시리즈로도 유명한데 그중 베이컨 맛이 난다는 것도 있어 그냥 평소 좋아하던 IPA시리즈와 다른 맥주들을 골랐다. (맛에 있어서는 그만한 도전 정신이 없었나 보다.) 

  


맥주 중 7 Hop IPA가 가장 내 취향이었는데 그들 소유의 농장 'Rogue Farm'에서 길러지는 7개의 홉을 섞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7가지 홉은 Liberty, Newport, Revolution, Rebel, Independent, Freedom, Alluvial.) 여러 개의 홉이 들어간 만큼 맛이 복합적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과하지 않고 아주 꽉 찬 느낌의 훌륭한 맛이었다. 코끝을 후려치는 감귤, 망고 같은 열대과일과 솔, 풀내음, 거기에 캐러멜 향이 적절하게 어우러졌다. 쌉싸르하면서도 달달한. 농장에서 길러낸 7가지 홉에 깃든 정성이 느껴지는 아주 화사한 느낌의 IPA였다.     

그렇게 맥주와 함께 식사를 하며 내 얘기는 물론 John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동안 나누었다. 그는 집에서 홈브루잉도 직접 하고 맥주 축제도 많이 찾아다닌다고 했다. 곧 Bend에서도 맥주 축제가 열리는데 내게 기회만 된다면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루트상 다시 인랜드로 향하긴 어려웠기에 다음번에 찾아야겠다고 했더니 그는 내가 가는 길마다 브루어리를 추천해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며 말을 덧붙였다.     


"Ha. 내가 너만큼 젊었다면 그렇게 맥주 여행을 다녀보고 싶어.

나는 자전거와 맥주 둘 다 좋아하지만 그렇게 떠나볼 생각은 하지 못했거든.

그래서 조만간 미국 횡단을 해볼 작정이야. 왕복이면 더 좋고.

너의 용기가, 그리고 너의 도전이 내겐 큰 자극제가 됐어. 고마워!"     


그와 뜨거운 포옹을 한 나는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이 여행이 그에겐 새로운 도전을 향한 계기가 되었다고 말해줌으로써 대단하지도 않았던 내 여행을 더욱 특별하게끔 여기게 해 주었으니 말이다. 짧은 시간 나를 배려해준 그의 따뜻한 마음씨와 나와의 만남을 소중히 여겨준 그에게 참으로 감사했다.       

             

그리고      


다시 출발해야 하는 것이 힘겨워 멈추어 서기를 주저하는 것보다 이런 순간들이 다음 목적지를 향해 더욱 힘껏 내달릴 수 있는 인연을 만나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알게 해 준 그 풍경에 감사했다.     




7 Hop I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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