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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nghwan Connor Jeon May 24. 2021

서울, 중국, 그리고 미국- 2

월급은 줄었지만 행복도는 쑥!

2002년 당시 연변한국국제학교에서 제시한 연봉은 한국에서 받는 것에 비해서 다소 적었다. 어차피 서울에서 발령은 받은  3년째 밖에 되지 않아서 월급이 별로 많지 않았으니 중국에서 받는 연봉이 서울에서 받던 것에 비해서 다소 적은 금액이었으나  차이는 나지 않았다. 비록 한국 에서 보다 약간 적은 금액의 이었지만  돈으로   있는 것들은 훨씬 많았는데  이유는 현지의 근로자들에 비해서 내가 받는 월급이 월등이 많았기 때문이다.


2021년 현재도 중국의 근로자들이 받는 평균 월급을 한국의 근로자들과 비교해 본다면 큰 차이가 있듯이 당시에는 그 차이가 더욱 커서 액수상으로는 한국보다 더 적은 금액을 받았지만 그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훨씬 많았다. 당시 나의 연봉이 현지의 중국인 교사가 공립학교에서 받는 것에 비해 8배 정도 더 많았으니 말이다.


중국에 머무르게 되면서 가장 먼저 한 것은 중국어 개인 교사를 구하는 것이었다. 일단 중국에 왔으니 원어민으로부터 중국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연결이 잘 되어서 공립학교에서 교사로 일을 하고 있는 남자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내가 근무했던 학교의 시작 시간이 오전 8시였기 때문에 선생님을 내가 사는 집으로 오라고 해서 오전 6시부터 7시까지 중국어 수업을 듣고 오전 7시부터 30분 간 동내에 있는 가까운 시장에서 아침을 함께 먹고 택시를 타고 학교로 출근을 했는데 이 모든 비용을 내가 다 댔지만 지출한 금액은 1000원 남짓이었다. 과외비가 시간당 750원, 주로 흰 쌀죽과 반찬 2개였던 두 명의 아침 식사비가 300원, 택시비가 300원 정도였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겠지만 그 당시의 연변은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번 부유하다고 느꼈던 시절이라고나 할까.


한국은 주 5일제를 시작하지 않았을 때였지만 중국은 이미 주 5일제를 실시하고 있어서 토요일이면 동네 백화점에 가서 DVD 쇼핑을 하곤 했다. 비록 해적판이었지만 DVD 한 장에 한국 돈으로 100원 정도면 구입이 가능했으니 한 번 갈 때마다 여러 장의 DVD를 구입하곤 했었다. 주말이면 구입한 영화 두세 편을 보는 것은 당시 친구도 별로 없었던 나의 여가시간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이기도 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 구입한 DVD들은 책장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하느라 이제는 더 이상 만질 일이 없는 이 아이들은 한때의 추억을 머금은 채 먼지만 쌓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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