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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nghwan Connor Jeon Jan 29. 2023

서울, 중국, 그리고 미국 - 25

닝샤 회족 자치구 봉사

2002년 당시 베이징에서 닝샤로 가는데 36시간이 걸렸다. 교통사고가 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어서 물리치료를 중단하고 기차로 36시간이나 걸리는 닝샤에서의 한 달간의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선택이었지만 새롭게 알게 된 J를 더 알아가고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인구의 대부분이 무슬림들인 닝샤에서 생활하면서 이전에는 겪어 보지 못한 소중한 경험들을 했다. 한국이나 중국과는 전혀 다른 문화도 새로웠다. 한국의 60년대와 같은 길거리나 시장 풍경, 건물들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착각을 주기도 했다. 그곳에서 만났던 학생들과 주민들은 매우 친절했고 배려가 깊었다.


봉사활동을 했던 학교에는 흙먼지가 날리는 교정에 스러져가는 교실 몇 동이 있었고 교실에는 매우 낡은 책걸상과 시멘트벽에 검정 페인트를 칠한 칠판이 전부였다. 밤에는 가로등이 없어서 손전등을 들고 다녀야 했고 야외에 위치한 화장실에는 칸막이가 없어서 팀원들은 의도치 않게 아침마다 화장실에서의 어색한 대화를 서로 강요당하기도 했다.


우리가 준비해 간 다양한 활동들을 학생들은 방학 중임에도 진심으로 즐거워하며 참여를 했고 떠나기 전 자신들이 선물로 준비한 공연을 보여주기도 했다. 특별히 숙소로 가져온 찐 옥수수가 성인 팔뚝보다 더 크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당시 주말이면 J와 봉사단원들은 닝샤와 가까운 지역들을 둘러보고 봉사기간이 끝난 다음에는 시안에 들러 진시황제 유적지도 함께 여행하기도 했다. J와 시간을 보낼수록 그에 대해 좀 더 알아가고 더 가까운 존재가 되기를 바랐다. 4주의 시간이 지나고 봉사활동도, 여름방학도 끝이 보였다.


봉사를 다녀온 이후에는 나는 J와 더 잦은 만남을 갖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한국국제학교에서 초청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나의 연봉은 한국에서 받던 것과 액수 면에서 비슷했지만 20년 전의 중국 물가에 비하면 매우 풍족했다. 중국 현지의 교사들의 연봉과 비교하는 6-7배 이상을 받는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현지의 음식점에서 외식을 하거나 쇼핑을 할 때면 왠지 돈을 더 버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돌아보면 지금의 아내인 J와 신나는 시간을 보내는데 있어서 당시의 금전적 풍족함이 도움이 많이 된 듯하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교통사고가 아니었다면 절대 이어질 수 없었던 J와 나는 더 발전된 관계로의 진전을 코 앞에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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