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처음 담임을 맡았던 2010년
드디어 미국에서 첫 담임을 맡은 학기의 개학날이다. 내 교실로 37명의 학생들이 들어왔다. 방학 동안 한 달 가까운 시간을 교실에서 보내며 이 날을 준비했지만, 나는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한국에서 처음 교직을 시작했을 때 느꼈던 감격도,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듯한 익숙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1학년 학생들은 그 나이답게 친구들과 수다를 떨거나 교실을 돌아다니느라 바빴고, 나는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몰랐다. 머릿속으로 수없이 시뮬레이션하며 준비했던 것들은 생각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고국이 아닌 이곳에서, 나와는 문화와 경험이 전혀 다른 학생들을 대상으로, 나의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방식의 교육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 내일 바로 오늘보다 더 나은 수업을 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부끄럽고 미안했다.
내가 그렇게도 싫어했던 교사 M과 교사 V는 최소한 나와 달리, 학생들과 같은 언어와 문화,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다. 내가 힘들어하고 어려워했던 본질적인 문제는 그들에겐 없었을 것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때는 그들도 좋은 교사였던 시절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내가 보았던 그들의 단점은 힘든 시기를 지나던 그들 삶의 한 편린을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일반화한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 시기에 그들을 떠올렸던 것은, 미국에서 교사로 일하기에 한없이 부족한 나를 보며 위로받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도 한국에서는 꽤 괜찮은 교사였다고, 지금의 부족한 모습은 나의 일부분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강변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매 순간이 배움의 기회인 이 학생들의 시간을 나로 인해 낭비할 수는 없었다. 가정을 책임지는 입장이지만, 학생들의 배움을 망쳐가며 이 자리를 고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 학교의 개교와 함께 근무를 시작한 동료 교사에게 말했다.
“내가 이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만두겠다.”
미국에서 담임을 처음 맡고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 말을 들은 동료 교사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는 곧 괜찮아질 거라고, 좋아질 거라고 위로해 주었다. 비록 그 말이 큰 위로가 되지는 않았지만.
개학 이후 나는 거의 매일 저녁 7시까지 교실에 남아 다음 날 수업을 준비했고, 토요일에도 거의 매주 출근하여 다음 주 수업을 준비했다. 학생들에게 준비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는 생각과, 여기서 실패할 수 없다는 강박이 나를 계속 떠밀었다. 그렇게 3년을 정신없이 바쁘게 보낸 후, 나는 더 이상 저녁 늦게까지 남거나 주말에 학교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여전히 어렵고 부족한 점이 많지만, 같은 것을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어느 정도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교육학을 배우며 접했던 연구 중 아직도 기억나는 내용이 있다. 교사가 스스로를 ‘교사’로 온전히 인식하고 받아들이기까지 14년이 걸린다는 것이다. 2025년 봄, 이 학교에서 근무한 지 15년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곳에서 교직을 그만두지 않았다. 학생들 앞에 온전한 교사로 서기 위해 여전히 부단히 노력 중인 부족한 입장이지만, 지난 15년간 이 일을 계속해 온 것은 어쩌면 직업인으로서 나와의 타협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 타협으로 인해 부족한 나의 수업을 겪어야 했던 많은 학생들에게 여전히 큰 미안함을 가지고 있다.
이곳에서 이상적인 교사가 되기 위해 해결해야 할 여러 가지 문제들은 여전히 나에게 존재하지만, 나만이 줄 수 있는 다른 장점들로 학생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다. 아니, 너무 거창하다. 한국에서처럼 이제는 교실에서 학생들과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 지금, 나는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