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Education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unghwan Connor Jeon Oct 07. 2015

체벌은 사랑의 표현?

바꾸려 하지 말고 이해해 주세요.

서울에서 교직을 시작하면서 5학년 담임을 맡았다. 한 학년이 9 학급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큰 학교 였지만 남자 교사는 한 학년에 한 명정도 있을 뿐이었다. 같은 학년을 담당하셨던 다른 분들께서는 내가 남자여서 고학년 남학생들을 잘 다룰 거라고 생각하셨는지 반에서 말을 잘 듣지 않는 남학생들을 우리 반으로 보내곤 하셨다. 말썽을 피운 학생들이 우리 반으로 오면 나는 반에 있는 빗자루 막대기로 엉덩이를 한 두대 때려주고는 반으로 돌려 보냈었다. 그 학생들에게 왜 우리 반으로  보내어졌는지 이유도 묻지 않았다. 다른 교사들에게 왜 그 학생들을 우리 반으로 보냈는지 묻지 않았다. 초등학교, 고등학교에서 교사들로부터 비인격적인 체벌을 경험했던 개인적 경험에도 불구하고 교사로서 학생들을 체벌하게 된 위치에 선 나는 그렇게도 비인격적이었다. 나에게 이유들은 별 의미가 없었다. 원래 학교란 그런 곳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미국 학교에서 처음으로 맡은 직책은 과잉행동장애, 경미한 학습지체가 있는 특수반에서의 보조교사였다. 그곳에 있는 학생들은 언어적인 문제, 행동적인 문제, 학습과 관련한 문제들이 있었다. 이들 학생들은 담임이 관찰을 한 후 부모, 교장, 전문가가 함께 참여하여 몇 번의 SST(student success team)회의를 거쳐서 부모의  동의하에 IEP(individualized education plan)를 시작하면서 이들 반으로  보내어진다. 당시  3학년부터  5학년까지의 학생들은 또래의 아이들과 함께 교실에 앉아서 수업의 진도를 따라가기  힘들어했고 꾸준히 의자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행동에 있어서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 학생들은 그곳에 모여서 서로의 나쁜 점을 서로 가르치고 배우고 있는 것 같아 매우 마음이 아프고  우울했었다.


행동에 문제가 있는 학생들을 한 반에 모아 두고 수업을 진행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 당시 담임은 십 년 이상의 경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학급을 통솔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다. 학생들이 어이없는 행동을 보일 때마다 한국에서 사용하던 몽둥이가 생각이 났다. 마음 같아서는 일렬로 세워서 보란 듯이 체벌을 하고는 내가 세운 기준을 따르지 않는 학생들은 모두 다 이렇게 험한 꼴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교사가 학생들에게 입히는 아주 경미한 신체적, 정신적 상해로도 그 경력에 매우 치명적으로 작용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불 같은 화를 꾹꾹 눌러 담아야 하곤 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한국에서 그렇게도 무정하게, 무심하게 들었던 마법의 몽둥이를 이렇게 쉽게 포기하다니.


제도라는 것의 위력에 새삼스레 감탄하게 된다. 한국에서 이유도 묻지 않고 휘둘렀던 몽둥이. 제도로 금지되어 있는 환경에 놓여 있고 보니 이 몽둥이는 더 이상 나의 선택이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아이들의 행동을 바꿀 수 있을까? 체벌은 이미 선택사항이 아니므로 다른 대안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수업을 더 재미있게 만들고 학부모의 참여와 협조를 유도하고 미리 준비하고 계획하는 것. 몽둥이를 내려놓은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의외로 많이 있다고 느껴졌다. 어쩌면 체벌을 내려놓은 순간부터 학생들을 내 방식대로 바꾸어 놓고야 말리라는 신념은 사라지고 그들이 보여주는 행동을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을 시작했는지 모른다.  


점차 한국도 체벌이  금지되면서 학생들을 이제 어떻게 가르치냐며 항변하는 교사들의 볼멘 소리를 다룬 신문 기사를 몇 번 본 기억이 있다. 체벌로는 학생들의 행동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에 매를 들어본 사람이면, 매를 맞아본 사람이면, 이를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도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 했던가. 말 한마디에, 교사들의 작은 표정 하나에 웃고 우는 아이들이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을 바꾸어줄 누군가가 아닌 그들을 이해하며 마주 보는 누군가 일지도 모른다. 바쁜 생활에 지친 부모에게서 얻을 수 없었던, 상처받은  가족으로부터 얻을 수 없었던 따뜻하고 깊은 진지한 눈빛. 교사들에게 이 눈빛을 주문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까?


내가 무정하게 들었던 몽둥이에, 그 무심한 마음에 상처 받았을 모든 제자들에게 고개숙여 사과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