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체험>을 읽고
대부분의 동물들이 장애를 갖고 태어난 새끼를 그대로 죽이거나 죽게 내버려둔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 적이 있다. 생각해보면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다. 냉혹한 자연의 세계에서 장애를 안고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므로. 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 자녀에게 장애가 있다면. 인간은 동물과 다르지만, 여전히 동물의 일부이기도 하다.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인 체험> 속 버드(본명은 따로 있으나 책에서는 별명인 버드로 주로 등장한다)는 아내가 출산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갔다가 아이를 보고 경악한다. 뇌 헤르니아라는 장애를 안고 태어난 아이를 본 그는 두려움과 걱정을 넘어선 ‘혐오’를 느끼고, 병원에서 역시 아이를 죽게 내버려두라고 권유한다. 그는 도의적인 죄책감과 아이에 대한 연민을 느끼지만 동시에 아이를 처음 봤던 순간의 격렬한 혐오감을 떨쳐내지 못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그는 여자친구의 집을 찾아가 술과 섹스에 탐닉하며 현실을 잊고자 애쓰는데....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는 작품도 작품이지만 장애를 지닌 아들을 키운다는 개인사로도 유명하다. 오늘날에도 장애아를 키우는 일이 쉽지 않은데 1960-70년대에는 어땠을까. 차마 말로 다 하지 못할 많은 난관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경험을 자신의 작품 속에서 여러가지 형태로 풀어내는데, 문학이 삶의 돌파구로 작용한 전형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인 체험>은 그 중에서도 초창기 작품으로 장애아의 부모가 느낄 법한 날것의 감정을 생생하게 그려냈다는 것이 인상 깊었다. 노벨상 수상작가는 과연 다르구나 하는 저력을 느끼기도 했다.
그렇다면 좋은 말 했으니 이제 욕할 차례. 작품을 읽으면서 최근 ‘개저씨 문학’이라고 비판 받는 한국 문학의 몇몇 작품들 및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근현대사에 있어서 한국은 많은 부분 일본에서 영향을 받았으니 문학 또한 예외는 아닐 것이다. <개인적인 체험>은 장애아의 부모가 느낄 법한 갈등과 고뇌, 고통을 생생하게 재현한 작품이기도 하지만, 작품성과 별개로 전형적인 ‘개저씨 문학’이기도 하다.
일단 작품 전체적으로 아내의 존재가 거의 미미하다. 오랜 시간 산고를 겪으면서 직접적으로 아이를 출산한 아내는 거의 등장도 하지 않으며, 주인공은 아이의 ‘처분’을 둘러싸고 아내와 일절 상의조차 하지 않는다. 60-70년대야 워낙 시대가 그랬다는 변명을 할 수도 있겠으나, 작품 속 버드의 경우 장인의 도움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즉 가부장제 하에서 상당히 무능력한 인물임에도 그렇다. 이뿐만이 아니다. 아이 문제로 골치가 아프고 괴로울 수는 있는데 그러한 갈등을 풀어내는 방법이 고작 여자친구의 집으로 찾아가 술을 퍼마시고 그녀와 섹스를 한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여자친구와의 인연이다. 오래 전 주인공은 술에 취해 대학시절 동기였던 그녀를 강간했던 전력이 있다. 이것을 뒤늦게 안(강간해놓고 모를 수가 있냐) 주인공은 스스로를 ‘한심한 놈’으로 여기고 좌절감을 느끼지만, 역시나 그 뿐이다. 강간 피해자인 여자친구는 원망도 분노도 없이 어찌나 친절하고 다정하게 지친 그를 위로해주는지.
물론 이러한 모든 것이 주인공의 ‘미성숙함’을 나타내기 위한 의도적인 장치일 수 있다. 문학작품을 현실과 똑같은 잣대로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50년 전 작품을.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자. 만약 여자 주인공이 저러한 행동을 했다면? 50년 전이 아니라 오늘날 출간되는 작품이라 할지라도 누구에게도 공감도 이해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개인적인 체험>을 읽으며 한국문학 속 많은 남자 주인공들을 떠올렸다. 아내가 몸을 팔아 생계를 근근이 이어가는데 오로지 무능력하고 가여운 자신에 대한 조소와 그로 인한 괴로움만을 토로한다든가, 자신이 그간 가했던 신체적 언어적 폭력에 대한 것은 생각도 않고 기껏 힘들게 일해서 귀한 음식까지 사왔는데 왜 먹지도 못하냐며 죽은 아내의 몸을 걷어차는 모습이라든가 하는데까진 가지 않더라도, 국가와 민족과 노동자들과, 민주주의에 대한 미래를 걱정하느라 너무 고뇌하는 나머지 매일 술을 퍼마시고 여성들의 육체에 기대며 ‘이토록 불쌍한 나’에 심취한 주인공들이 그간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무수히도 많았으므로.
<개인적인 체험>에서 역시 주인공의 괴로움의 근원은 오로지 자신이다. 그 외에는 아이에 대한 연민도, 아내에 대한 걱정도, 앞으로의 미래도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장애아의 아버지가 된 이토록 불쌍한 나’. 물론 앞서 말했듯이 시대적인 상황을 충분히 고려해야 하며, 젠더 감수성이 부족해도 작품성이 뛰어날 수 있다고 개인적로는 생각한다만, 하여간 한국문학과 일본문학은 꽤 다르지만 한편으로는 이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계기였다.
추가로 이야기하자면 근래 재출간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번역이 엉망진창이었다. 한국어로 대체할 수 있는 많은 부분을 일본어 표현 그대로 옮겨서 읽는데 상당히 방해가 되었다.
⭐️⭐️
버드는 처음으로 그의 아들을 보았다. 그것은 주름살과 기름 찌꺼기 투성이의 조그맣고 빨간 얼굴을 한 보기 흉한 아기였고 눈은 조개껍질처럼 꽉 감고, 콧구멍엔 고무관이 끼워져 진주광택이 있는 분홍색 구강을 활짝 열어 보이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버드는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들고 일어나 아이의 붕대 감긴 머리를 보았다. 붕대의 뒷부분은 많은 양의 피투성이 탈지면 속에 묻혀 있었지만 거기에 이상하고 커다란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p.47-48
버드에게 있어 아이의 이상은 그것을 둘러싸고 타인과 이야기를 하긴커녕 혼자서 다시 생각해 보려하는 것만으로도 지극히 개인적이고 뜨거운 수치의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라오는 버드만의 고유한 불행이었다. 그것은 지구상의 모든 타인들과 공통의, 인류 모두에게 걸려 있는 문제는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p.73
몇 번짼가 잠이 깼을 때, 버드는 자신이 집행유예의 어정쩡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그리고 버드는 자신이 지금 외톨이가 아니라 히미 코와 함께 밤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에서 뜻밖에도 깊고 강한 위로를 발견했다. 버드가 어른이 되고 나서 그처럼 타인을 필요로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p.176
“수술로 아기의 생명을 구한다고 한들, 그래서 뭐가 되지? 버드. 그는 식물인간이 될 뿐이라고 하잖아? 넌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 뿐 아니라 이 세상에게도 전혀 무의미한 존재 하나를 살아남게 만드는 거야. 그것이 아기를 위하는 길이라도 된다는 거야? 버드.”
“그건 나를 위해서지. 내가 도망만 치는 남자이기를 멈추기 위해서”하고 버드는 말했다. -p.271-272
“자넨 이번 불행과 정면에서 맞서 잘 싸웠군 그래”하고 교수가 말했다.
“아뇨. 저는 여러 번 도망치려 했었어요. 거의 도망쳐 버릴 뻔 했었죠”하고 버드는 말했다. 그러고는 자기도 모르게 원망스러움울 억누르는 듯한 음성이 되어 “하지만 이 현실의 삶을 살아 낸다고 하는 것은 결국 정통적으로 살도록 강요당하는 것인 모양이네요. 기만의 올무에 걸려 버릴 작정을 하고 있는데도 어느 샌가 그것을 거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그런 식으로요.” -p.274
아기 눈의 거울은 말갛게 개인 깊은 회색으로 버드를 비추어 냈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미세하여 버드는 자신의 새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먼저 거울을 보아야지, 하고 버드는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버드는 본국 송환을 당한 델체프 씨가 표지에 ‘희망’이라는 낱말을 써주었던 발칸 반도의 조그만 나라의 사전에서 맨 먼저 ‘인내’라는 낱말을 찾아볼 작정이었다. -p.2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