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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Jan 29. 2019

검열하는 삶

<당신이 남긴 증오>를 읽고

앤지 토머스의 <당신이 남긴 증오>는 미국의
인종문제를 다룬 소설이다. 뭔가 ‘그럴 듯’ 해 보이는 제목은 투팍의 노래에서 따온 것이라고.

16살의 스타는 어느 날 파티에서 친구인 칼릴과 귀가하는 길에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게 된다. 속도위반도 하지 않았고, 검문에 걸릴만한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경찰은 시종일관 마치 그들이 범죄라도 저지른 양 강압적으로 대한다. 결국 운전자였던 칼릴은 스타에게 괜찮냐고 물어보려 몸을 틀다 경찰의 총을 맞고 숨진다. 사건 이후 흑인들은 분노하며 폭동을 일으키고, 언론은 유일한 증인이었던 스타에게 관심을 갖는다. 스타는 ‘보이지 않는 적’에 대항하여 길고 긴 싸움을 시작하게 되는데...

인종문제는 여러 의미에서 젠더 문제와 상당히 비슷하다. 둘 다 당사자가 아니면 절대 알 수 없는 부분이 있고, 당사자가 아닌 쪽, 즉 상대적 강자로 인식되는 사람들(백인, 남성) 입장에서는 공감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그런 사소한 무신경함에도 무척 화가 나곤 했는데, 지금은 일면 이해가 간다. 나 역시 내가 당면하지 않은 수많은 문제에 무신경한 경우가 많고, 이해하지 못하는 때가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 입장에서는 정말로 인종과 젠더 관련 약자들의 이야기를 납득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흑인이 대통령까지 되었고, 별 것도 아닌 농담 한마디 했다가 인종차별주의자로 몰려 대학 입학 취소되는 사람도 있는데, 이제는 나보다 돈도 잘 벌고 잘 나가는 흑인 고위층이 얼마나 많은데, 왜 흑인을 따로 배려해줘야 하는지, 왜 흑인들은 자기들끼리는 욕하고 말도 막 하는데 왜 우리가 그런 단어를 사용하면 안 되는지, 군대도 안 가는 여자들은 남는 시간에 고시 공부해서 전문직이 되고, 나보다 훨씬 잘 나가면서, 온갖 꿀은 다 빨면서 의무는 다하지 않는 것 같은데, 언제 적 성차별 이야기인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사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예전 같은 노골적인 차별은 ‘일부’ 사회에서는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흑인이 어딜 감히’, ‘여자가 어딜’ 같은 것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미묘한 차별이 존재하기도 한다. 이상하게 찜찜하고 불쾌하지만, 항의하면 예민하고 극성스러운 사람이 되어버리는. 이를 의미하는 micro discrimination이라는 용어도 있다.

<당신이 남긴 증오>에서는 이러한 미묘한 차별이 잘 그려진다. 스타는 엄마의 고집으로 마약 판매상과 갱단의 아이들로 득시글 거리는 동네의 학교 대신 차로 한 시간이나 떨어진 ‘백인’ 학교에 다니고 있다. 모두들 친절하고 잘 대해주는 그곳에서 스타는 끊임없는 자기 검열에 시달린다. 그들은 ‘쿨하면서’ ‘교양 있는’ 흑인 친구를 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네 친구들과 말하듯이 슬랭을 섞어 말해서는 안된다. 슬랭은 범죄자와 빈민의 말투니까. 그렇다고 백인처럼 말해서도 안된다. 스타는 흑인이니까. 심지어 학교의 많은 아이들이 스타를 한 학년 위의 다른 흑인 남자애와 자연스레 엮어서 사귀는 사이처럼 대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학교에 있는 유일한 흑인이므로, 흑인은 흑인끼리 사귀는 것이 당연하니까.

이러한 사소하고 미묘한 차별과 고정관념 및 편견이 납득이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흑인들 중 갱이 많은 것이 사실이고 마약 관련한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제대로 된 직업을 구하기 어렵고, 빈곤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구조적인 문제가 따라오고. 당사자가 아니면 알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과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16세 소녀의 관점에서 알기 쉽게 그려낸 것이 이 소설의 장점이라 생각한다.

다만 이 소설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중요한 사회문제를 다룬 의미 있는 소설이라 생각함에도 쉽게 추천하기 어려운 이유이다. 우선 이 책은 전체적으로 ‘청소년 소설’ 같은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 16세 스타의 관점에서 서술되는 음악, 패션, 우정 관련한 여러 디테일이 손발을 오그라들게 만들 뿐만 아니라, 감정은 단편적이고 인물들 간의 대화는 정형화되어 있다. 문장은 단순해서 읽기 쉽지만 밋밋하기 짝이 없다. 조이스 캐럴 오츠의 <폭스파이어>는 심지어 13-14세 소녀들이 주인공임에도 전혀 그러한 느낌이 없었던 것을 보면 단순히 주인공의 나이가 16세이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말투나 사고가 너무 유치해서 16세가 아닌 초등학생 정도로 느껴지기도 한다.

게다가 주인공의 애정문제와 관련한 여러 장면을 읽다 보면 마치 <트와일라잇> 사회판을 읽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자기 외모에 썩 관심도 없고 헐렁한 후드티에 청바지만 입고 다니는 스타를 두고 동네의 모든 남자애들이 그녀와 사귀길 원한다든지, 스타의 백인 남자 친구인 크리스가 아주 부잣집 아들인데 개념까지 충만하다는 설정 등이 그렇다. 집에 있는 16대의 차 중 한대를 끌고 스타를 데리러 오는 장면은 정말...... 백인이라는 이유로 크리스를 탐탁치않게 생각하던 스타의 아빠가 나중에 크리스를 인정하면서 “너 다음에 복싱장으로 와. 우리 딸을 맡길 수 있는지 한 번 시험해보마.” 하는 대사는 어지간한 사람의 항마력으로는 견디기 어려울 듯 하다.


사회문제를 알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의미 있는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는 게 힘겨웠던 이유다. 어린아이들만 이상한 것도 아니고 등장인물 모두가 그렇다. 마지막 50페이지가량은 스카이캐슬 19화 보는 줄 알았다.


⭐️⭐️




“왜 항상 모든 문제를 인종차별로 끌고 가는 거지?” 삼촌이 물었다.
“자살이 아닌 한 우린 근처에 사는 다른 인종을 죽이지 않아.”
“다른 인종이 아니라 흑인이겠죠. 내가 타이론을 죽이면 교도소에 가겠죠. 하지만 경찰이 날 죽이면 그는 포상휴가를 받을 겁니다.” -p.59

윌리엄슨의 스타는 슬랭을 쓰지 않는다. 래퍼가 쓴다고 해도 그래서는 안되고 백인 친구들이 쓴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슬랭은 멋져 보이게 해준다. 하지만 슬랭은 ‘폭력배’처럼 보이게 한다. 윌리엄슨의 스타는 누군가 그녀를 짜증나게 해도 입조심을 한다. 누구도 그녀를 ‘화난 흑인 여자애’로 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윌리엄슨의 스타는 누구든 다가올 수 있도록 친근한 인상이어야 한다. 노려보거나 곁눈질을 하지 않는다. 윌리엄슨의 스타는 누구도 자신을 빈민가 출신이라고 부르도록 만들지 않는다. -p.77

“하, 잠시만요.” 엄마가 말했다. “지금 칼릴과 스타를 재판에 세울 건가요, 아님 그를 죽인 경찰을 세울 건가요?”
윌크스 형사가 노트에서 고개를 들었다.
“저, 저는 이해가 안 갑니다. 카터 부인.” 고메즈
형사가 더듬거렸다.
“형사님은 제 아이에게 그 경찰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어요.” 엄마가 말했다.
“계속 칼릴에 대해서만 묻고 있죠. 마치 죽은 게 그 애 탓인 것처럼. 스타가 말했듯이 칼릴은 총을 쏘지 않았어요.”
“저희는 전체적인 그림을 보려는 겁니다, 카터 부인. 그뿐이에요.” -p.109

내 두 세상을 하나로 융합해야 할 순간이지만 어떤 스타를 내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슬랭을 써도 되지만 너무 많이 쓸 순 없고 흑인 특유의 행동을 해도 되지만 너무 가서도 안 되니 난 ‘멋진 흑인 여자애’가 아닌 것이다. 말조심을 하고 말투도 조심해야 하지만 ‘백인’처럼 말해서는 곤란하다.
젠장, 이건 피곤한 일이다. -p.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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