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것들>을 보고
회사에 갓 입사했을 때, 팀장님이라든가, 그룹장님이라든가 하고 정확히 10살 차이가 났었다. 20대 중반에게 30대 중반은 얼마나 까마득한 어른처럼 보이던지. 그러다 막상 그들의 나이에 이르자 너무 별것이 아니라 오히려 놀랄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10살 더 나이 들었다고 딱히 더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 뭔가를 더 많이 알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는 것, 정서적인 상태나 안정감 역시 썩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
가끔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흐르는지, 육체에 비해 정신은 얼마나 늙지 않는지에 대하여.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50대가 된다고 하여 - 아직 안 되어봐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 머릿속이 20대였을 때의 그것과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사람들 대부분이 몇 살이 되었건 20대였던 자신의 모습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 같고.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SNS 등에서 젊은 여성에게 더러운 농담을 하거나 쓸데없는 메시지를 보내는 아저씨들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머릿속에서는 아직도 이팔청춘. 사실 나이를 먹는다고 감정이 무뎌지지는 않기도 하고. 기쁨, 슬픔, 그리움과 외로움. 마음은 그대로인데 몸은 그대로가 아니라는 것은 실은 정말 슬픈 일이다. 물론 늘 그렇듯이 이해와 용서는 별개의 문제지만.
<다가오는 것들>을 봤다. 25년간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한치의 오차도 없이 믿어왔던 남편은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 고백을 하고, 치매 증상을 보이는 어머니는 하루가 다르게 호출을 해대면서 들들 볶아대고, 오랜 기간 함께해 오던 출판사에서는 하루아침에 잘린다. 자식들은 장성해서 떠나버리고, 애지중지하던 제자에게는 정치적으로 비겁하다며 비판을 듣는다.
뭔가 이 이상 비참할 수가 있는가 싶지만 한편으로는 ‘사연’이라고 하기도 뭐할 정도의 아주 평범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고 시간이 흐르면서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찾아올 일들. 모든 배우자가 바람이 나지는 않지만, 죽음이든 뭐든 간의 이유로 사랑은 언젠가는 반드시 끝난다. 그 누구도 영원히 일할 수는 없는 법이고, 부모님도 자식들도 언젠가는 떠나가기 마련이다.
<다가오는 것들>은 제목처럼 그야말로 누구에게나 언젠가 일어나고야 말 일들을 담담히 보여준다. 보다 보면 10년 후의, 20년 후의, 30년 후의 스스로의 모습을 상상하다 아득해지고 만다. 남편도, 부모님도, 자식들도 없이 완전히 홀로 남겨지게 될 나. 지금까지 늘 혼자 있는 것이 좋다고 말하며 살아왔지만 오직 혼자만 남겨진 그 순간에도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던 그 사람인 채로 있을 수 있을까.
사실 많은 영화나 소설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주인공에게 손쉬운 해법을 제공할 것이다. 젊고 잘생긴 남자와의 새로운 사랑. 나 역시도 영화의 마지막 순간까지 주인공이 혹 어리고 어여쁜 제자와 눈이 맞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했다. 그러나 주인공은 새로운 사랑을 찾으시라며, 그런 여성들도 많다고 자신을 위로하는 제자에게 이야기한다. “영화에서나 그래.”
“영화에서나 그렇다”는 주인공의 말처럼 <다가오는 것들> 안에서 끝까지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치매에 걸렸던 어머니는 죽고, 남편은 새로 찾은 사랑과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사이좋게 알콩달콩 지내고, 자식들은 거의 찾아오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주인공은 계속 일상을 살아갈 뿐이다. 어떠한 행운도 큰 변화도 없이.
다시 앞의 장면으로 돌아가서. 영화에서나 그렇다고, 너도 참 보기보다 순진하다는 타박을 하자 제자는 어쩔 줄 몰라하는데, 그런 제자를 앞에 두고 주인공은 이야기한다. 괜찮다고. 별 거 아니라고. 그래도 인생은 계속된다고. 그녀는 자신의 말처럼 그대로 묵묵히 생을 살아간다. 비록 때때로 남편을 원망하고, 제자에게 서운함을 느끼며, 밤에는 복받치는 외로움에 눈물을 터뜨리는 날도 있지만, 아침이면 곧 눈물을 닦고, 다시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그렇기에 이 영화는 조금 쓸쓸하고, 많이 아름답다. 그리고 무엇보다 용기를 준다. 다가오는 것을 그럭저럭 대비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만한 용기를. 지금의 생각과 먼 훗날 실제로 그런 날이 닥쳤을 때의 마음이 같을 수 없다고는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