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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Mar 16. 2019

가짜와 진짜

<립반윙클의 신부>

어젯밤에 나름 불금이라 그대로 자기는 아쉽고 그렇다고 뭔가를 새로 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는데, 잠시 고민하다 영화를 보기로 했다. 차분하고 지루한 걸로. 그래서 보다가 스르륵 잠이 들만한 것으로. 그러면서 고른 것이 이와이 슌지 감독의 <립반윙클의 신부>였다. 그간의 작품 경향을 생각하면 보면서 막 잠이 깨고 정신이 번쩍 들 것 같지는 않아서.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결국 밤을 꼴딱 새우고 말았다. 세 시간짜리 아주 긴 영화를 끝까지 다 보고 잤다. 줄거리는 꽤나 평이한 편이다. 그래서 격렬한 재미를 주는 것이 아님에도, 영화의 흐름은 꽤나 느슨함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서서히 망가져 가는 과정에서 희한하게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주인공인 나나미는 성실하지만 소심하고 심약한, 나쁜 말로 하면 자기주관이라곤 없는 바보 같을 정도로 순진한 여성이다. 반면에 인터넷에서는 나름 솔직한 생각을 표현하며 모든 것을 자신의 SNS에 적는다. 남친과의 만남, 고민, 갈등, 미래의 꿈, 질문, 호기심, 기타 등등. 새로운 정보나 타인의 호의에 대한 어떠한 의심도 없다. 결국 타인을 믿은 대가로 곤경에 처하고 끊임없이 추락한다. 놀라운 것은 모든 것을 체념한 상태에서도 자신을 함정에 빠트린 사람에 대해서 끝까지 신뢰를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이상 고구마를 먹일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답답한 캐릭터였지만, 사실 우리는 모두 어떤 의미에서 나나미를 닮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에 의존하고, 외로워하고, 거기서 만난 타인에게 기대고 싶어하고, 믿기 힘든 이야기를 자꾸만 믿고 싶어 하고. 지금 그녀를 보고 답답해할 수 있는 까닭은 어디까지나 상자 ‘밖’에서 지켜보고 있기 때문인 것이고.

나나미가 곤경에 처했을 때마다 바로 앞에 나타나 도움을 주고, 뒤에서는 속이고, 이용하고, 그러면서  타락과 동시에 구원을 주는 아무로라는 캐릭터는 마치 오늘날의 SNS를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즉각적인 위로, 부정확한 정보, 기만, 이후 점점 더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신기루 같은 존재. 물론 그 안에도 어떤 실낱같은 진심과 진실은 있지만.
 
나나미가 바닥을 뚫고 지하까지 추락하면 어쩌나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봤는데, 이와이 슌지 답게 어떤 의미에서는 해피엔딩이라 다행이었다. 우유부단하고 심지가 없는 것 같은 나나미는 그 어리석고 심약한 성정으로 인해 세상의 호된 면을 맛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끝까지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은 덕분에 작은 구원을 누리기도 한다.


믿음을 잃지 않은 덕분에 누군가 그녀의 좋은 점을 알아봐준 것이다. 소심하고 무지하고 어리석고 약하지만 타인에게 마음을 쉽게 열고, 맡은 일이 있으면 성실하게 임하고, 자신보다 더 외롭고 고독한 제자를 새로운 집으로 초대하는, 노래를 잘하고 목소리가 예쁘며 다정하고 조심스러운 그녀의 모습을. 그리고 그로 인하여 그녀는 아주 약간 변화한다. 타인의 시선에 줏대없이 휘둘리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에서 조금은 더 단단해진 땅을 딛고 설 수 있는 사람으로. 이리 저리 고초를 겪었지만 마지막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조금은 동화같았던 이야기.




4.5/5



“제가 마음 먹으면 당신은 1시간 안에 저한테 빠져들걸요.”
“엄청난 자신감이시네요.”
“아뇨, 자신감 같은게 아니라, 당신이 저한테 빠진다면 그건 제 탓이 아닙니다. 본인 스스로 빠져드는 거니까요.”
“무슨 말씀이세요?”
“본인이 마음이 있어서 빠져드는 거라고요.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거나, 마음이 안 채워진다거나 그런 느낌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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