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승혜 Mar 19. 2019

낙원 속에 지옥이 있어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유난히 견디기 힘든 종류의 이야기들이 있다. 강간, 아동학대, 그리고 왕따. 활자도 그렇고 영상도 그렇고. 왜 그렇게 견디기가 힘든지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그만큼 대상에 감정을 더 이입하게 되기 때문인 것 같다.

몇 년 전에 이와이 슌지 감독의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보다가 중간에 꺼버렸었다. 굉장히 불친절한 영화라 서사의 흐름을 따라가기 어려운 것은 둘째 치고, 주인공이 오밤중에 일진들에게 불려 나가 괴롭힘의 일환으로 자위행위를 강요당하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읽었던 정희진의 <혼자서 본 영화>라는 책에 이 영화 이야기가 나오더라고. 그러면서 다시금 보고 싶어 졌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릴리 슈슈란 가수를 좋아하는 두 중학생 소년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화는 한 때는 너무도 가까웠던 두 아이가 어떻게 잔인한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는지, 아이들의 순수가 어떻게 망가지는지, 소년들이 집단 안에서 약자를 학대하고 착취하는 방식은 어떠한지,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지를 보여준다. 동시에 이 영화는 두 명의 소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년들에 의해 다치고 짓밟히는 두 명의 소녀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저항하는 것에 관한.

이것도 벌써 몇 년 전의 일인데, 아는 사람이 아이 왕따 문제로 이사를 간 적이 있었다. 아이가 왕따를 당하자 아예 이사를 가서 학교를 전학시켜버린 것이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좀 극단적이지 않은가 싶은 생각을 했었다. 달리 해결할 방법이 없었을까 싶기도 했고. 그런데 막상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우리 아이에게 그런 일이 닥치면 어떨까 생각해보니, 과거에 내가 학교에 다니던 시절을 돌이켜보니, 너무나 막막한 것이다.

전학을 가야 할 만큼의 심각한 따돌림은 당한 적이 없지만 나름 친구들과의 트러블로 고통스러웠던 순간에, 반의 일진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순간에, 나였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물론 그 당시에 그렇게 하지 않았고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결코 쉽지 않을 듯 하지만, 만약 고민을 털어놓았다면 부모님은 어떤 행동을 했을까. 먼 훗날 우리 아이가 나에게 그런 고민을 상담해온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피해자는 그렇다 치고, 나는 늘 가해자들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악독한 지가 궁금했다. 왜 인간은 자신보다 약한 것에 그렇게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 동물의 세계는 그저 강한 것이 약한 것을 먹고 약한 것이 강한 것에게 먹히는, 그것만으로 끝나고 마는데 인간의 세계는 왜 그보다 훨씬 더 끔찍한지.

영화를 보고 나서 누군가를 괴롭히고 학대하는 행위 역시 크게 보면 생태계의 일환에서 살아가려고 발버둥 치는 행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옳다는 것은 당연히 아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보잘것없는 자아가 견뎌내질 못하는 것이다. 돌아서는 순간 잡아 먹히거나, 공격을 당할 것이라는 공포와 두려움. 결국 두려움을 해소하고 살아남기 위한 일환으로 자신보다 약한 것을 괴롭히고 착취하는 것이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더욱 망가져가는 길인 것을 모르는 채로.


주인공은 여름방학에 친구들과 오키나와에 갔다가, 자꾸만 마주치던 수상쩍은 아저씨로부터 나무와 덩굴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저거 있잖아, 목 조르는 식물이라고 해, 왜 그런지 아니? 큰 나무를 조금씩 휘감아서 나중엔 졸라 죽이거든. 빨리 돌려서 보면 엄청 잔혹한 광경일 걸? 산호초도 그래. 가는 촉수를 확! 찔러서 옆 산호를 죽이지.”

“정말이에요?”

“정말이지.”

“우리에겐 낙원처럼 보여도 자연 속 생물들에게 지옥일지도 몰라. 자연이란 그런 거지. 그게 멋진 거야.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 스릴 있잖아. 그렇지? 그래서 여행을 멈출 수가 없어.”

사람들은 흔히 추억에 젖어 어릴 때가 좋은 거라고들 이야기한다. 그러나 실은 아이들은 어른들에 비해 훨씬 잔인하고 무서운 세계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밖에서는 비록 평화로운 낙원처럼 보일지라도.


4.5/5

매거진의 이전글 가짜와 진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