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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Mar 26. 2019

당신의 과거와 미래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매일 12시가 되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페이스북 <과거의 오늘>을 들춰본다. 얼마나 오글거리는 글을 써놨을까 혹은 어떤 추억이 있었을까. 두려움 반 설레임 반. 며칠 전에는 7년 전 오늘의 사진이 떴다. 고작 7년 전인데 지금에 비하면 얼마나 파릇파릇하던지. 고작 7년 전인데.

어르신들이 들으면 코웃음 칠 말인지도 모르지만 30대 중반이 되면서 몸이 점점 달라지는 게 느껴진다. 체중은 같은데 허리 사이즈가 늘어났고, 씻고 나와 머리를 말리다 사뭇 늘어난 흰머리를 발견하고선 깜짝 놀란다. 엊그제는 저녁을 배불리 먹었더니 한밤중까지 소화가 되질 않아 한참을 고생했다. 격렬하지는 않아도 매일 조금씩 변화가 진행된다. 30대인 지금부터 이렇게 느껴질 정도인데, 그렇다면 40대에는, 50대에는, 그 이후에는 어떠할는지.

오래전 원로 연예인들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다가 몹시 놀랐던 적이 있다. 요즘의 배우들보다도 오히려 훨씬 더 아름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할머니 할아버지 역할로 잠깐씩만 화면에 비치는 그들에게 이렇게나 찬란한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 한때는 시대의 상징이자 청춘의 우상이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지금에 와서 새삼, 당사자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날이 갈수록 변화하는 몸, 예전 같지 않은 주위의 반응과 입지, 그 안에서 그들은 새로운 역할에 잘 적응할 수 있었을까. 뭐, 적응하는 것 외에 다른 수가 없었겠지만.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는 나이 든 여배우의 이야기이다. 한참 위의 여성 상사를 유혹해서 파멸에 이르게 만드는 젊고 당돌한 ‘시그리드’ 역할로 단숨에 세계적인 스타가 된 마리아는 세월이 흘러 이번에는 유혹을 당하는 쪽인 ‘헬레나’ 역할을 제안받는다. 그녀는 처음에는 탐탁지 않았지만 주변의 설득으로 하는 수 없이 배역을 맡는다. 하지만 대본 연습이 진행될수록 그녀는 평정심을 잃고 괴로워한다. 자신이 더 이상 젊고, 당당하고, 공격적이고 , 생명력 넘치며, 가차 없었던 시그리드가 아니라 늙고, 나약하고, 비굴하고, 패배자와 같이 매달리는 헬레나라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하다 보니 조수가 시그리드 역할을 맡은 신인 배우가 훌륭하다고 칭찬하자 자신보다 더 뛰어나냐고 되물어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본인은 이미 세계적인 배우이며 시그리드 역할을 맡은 이는 고작 신인일 뿐인데도. 또한 애꿎은 대본을 탓하며 너무 시그리드에게 편파적인 내용이라고 불평하기도 한다. 그런 그녀에게 조수는 당신이 시그리드 역할일 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잖아요,라고 상기시키는 한편, 텍스트는 물체와 같아서 어디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읽히는 것이라며 균형을 잡아준다.

당신이 시그리드 역할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신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기 때문이라고. 젊음은 실제가 특권이며 아름답기도 하지만 동시에 누구에게나 지나가는 시기일 뿐이며 노화는 불편한 부분도 있지만 한편으로 지혜와 인간미를 주는 것이라고. 당신은 사랑에 매달리는 것은 나약한 패배자, 무자비하고 공격적으로 사랑을 걷어차는 것은 당당한 승리자로 생각하지만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러나 한 번 굳어진 마리아의 생각은 쉽사리 바뀌지 않고 그로 인해 영화 내내 조수와 끊임없이 갈등한다. 애정과 분노, 시기와 질투 사이를 오가며 견제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연극 속 헬레나와 시그리드의 모습과 묘하게 겹쳐진다.

아이러니한 것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젊은 시그리드보다 나이 든 헬레나가 훨씬 더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다는 사실이다. 냉담하고 오만한 시그리드보다 연약하고 비굴하고 순수한 헬레나 쪽에게 훨씬 더 마음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레나를 연기하는 마리아는 계속해서 젊은 배우를 질투하고 불안함과 초조함을 느끼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노화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는 것, 그리고 나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 하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젊음을 부러워하고 어여삐 여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므로 그것을 받아들이되, 시기하고 미워하지 않는, 몸의 변화에 적응하는, 주변의 변화에도 익숙해지는, 그런 품위 있는 노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대단히 어렵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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