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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Apr 01. 2019

어떤 선한 마음들

<죽여주는 여자>

‘박카스 할머니’의 존재를 처음 알았을 때 정말이지 충격적이었다. 어릴 때는 나이가 들면 성욕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었기 때문에(지금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 연배가 되어서까지 성을 구매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충격적이었고,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성을 판매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역시 충격적이었고. 그 대가가 고작 2-3만 원 수준의 푼돈(?)이라는 것 역시 놀라웠고.

그래서 몇 년 전 ‘박카스 할머니’를 소재로 영화가 제작된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다른 무엇보다도 얄팍한 호기심이 먼저 동했던 것이 사실이다. 대체 어떤 사람들이 성을 사고, 파는 것인지, 그렇게 된 사연은 무엇인지, 어떻게 그런 일을 계속할 수 있는지. 그러다가 한참 뒤인 이제야 영화 <죽여주는 여자>를 보게 되었다. 돌이켜보니 사연이랄 것도 없이 당연한 이야기다. 돈, 또다시 돈. 2-3만 원의 푼돈에 성을 판매한다는 것은, 그 돈조차도 절실하며 그 돈을 벌어들일만한 다른 수단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굉장히 다양한 이슈를 다루고 있는데, 노인빈곤층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안락사 및 존엄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성매매 및 여성 전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며, 이주 노동자, 코피노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트랜스젠더,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사람들 마음 깊은 곳의 어떤 선한 부분에 대한 이야기라고 느꼈다.

<죽여주는 여자>에서 박카스 할머니인 소영(윤여정 분)은 어느 날 산부인과에 갔다가 입구에서 기다리고 서 있는 한 아이를 발견한다. 알고 봤더니 그 아이는 위층에 올라간 엄마를 기다리고 있던 것. 아이의 엄마는 양육비도 지급하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잠수를 타버린 아빠를 찾아 필리핀에서 한국의 병원까지 찾아왔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그와 다투다 결국 가위로 찌르고 경찰에 잡혀간다. 소영은 오갈 데 없는 아이를 집으로 데려와 돌본다.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어려운데 아무 연고도 없는 어린아이를 데려다 성의껏 보살피는 소영과 그녀가 일하러 나간 시간에는 큰 대가 없이 선뜻 아이를 맡아주는 트랜스젠더와 장애인 이웃들. 영화 속의 자잘한 등장인물들은 대개가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임에도 서로를 보듬고 지켜준다. 물론 큰 희생이나 봉사라고는 할 수 없다. 그저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의 최선.

나는 성선설을 믿지 않는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생물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악으로만 구성되었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럼에도 성악설 또한 믿을 수 없는 까닭은 간간이, 아주 드물게 만나는 모습들 때문이다. 아무런 대가도 보답도 바라지 않고, 그저 남을 위해 선뜻 손을 내밀고 가진 것을 나누는 어떤 사람들. 영화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참 좋았다. 불행 가운데에서도 어떤 희망을 느끼게 해주는 것 같아서. 그래서인지 소재에서 예상되는 것과는 다르게 영화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밝고 경쾌한 편이다.

장강명의 <팔과 다리의 가격>은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쳤던 함경북도 출신인 지성호 씨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팩션이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달리는 열차에서 석탄을 훔쳐다가 파는 것이 횡행하였는데, 지성호 씨 역시 당시에 석탄을 훔치다가 크게 다쳐 생사의 고비를 넘나 들게 되었다. 팔과 다리 한쪽을 잃고 거의 숨이 넘어가는 아들을 위해 어머니와 누이가 밤새 온 동네를 돌며 구걸을 하였으나 아무도 본 척하지 않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낮에 어떤 집에서 한 할머니가 양식을 가득 나누어 주었다고. 먹을 게 없어 모두가 굶어 죽어가던 그 시기에 말이다.

장강명 작가는 왜 첫날밤에는 모두가 거절했는데, 그다음 날에는 나누어주는 사람이 있었을까에 대해 오랜 시간 생각했다고 한다. 깊은 생각 뒤에, 그는 아무래도 밤과 낮의 차이 같다고 결론 내린다. 밤에는 보이지 않았던 모녀의 절박한 표정이, 낮에는 보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그래서 앞으로는 보이지 않는 부분을 더 많이 보이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영화에서 소영 역시 “근데 애는 왜 데리고 온 거예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몰라, 나두. 그냥 그래야 될 거 같아서.”


인간은 많은 경우 악하고 이기적이지만, 여전히 우리 안의 어떤 깊은 곳에 선량함이 남아있다고, 평소에 잘 보이지 않더라도 깊이 숨어있을 뿐이라고, 그렇다고 나는 믿는다. 믿고 싶다.



+ 윤여정 배우님 진짜 갓갓갓데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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