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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Apr 04. 2019

사랑과 혐오의 사이에서

영화 <시>

좋아하는 영화 중 <맨체스터 바이 더 씨>라는 작품이 있다. 아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여러모로 논란이 많았던 작품이다. 내용이 문제였다기보다는 주연인 케이시 애플렉 탓이었다. 케이시 애플렉. 배우 벤 애플렉의 동생이자 <맨체스터 바이 더 씨>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그리고 성폭행 전적으로 그러한 수상 자체가 엄청난 논란과 구설수에 올랐던 사람.
 
실은 해당 영화를 보기 전부터 논란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성폭행 전력이 있는 사람이 아카데미 수상의 자격이 있는가, 성폭행 전력이 있는 사람의 작품을 보는 것이 괜찮은가 하는. 나 역시 껄쩍지근한 마음에 영 끌리지 않아 안 보고 미뤄두었다가 나중에야 보게 되었다. 그런데 보고 난 후 마음이 너무나 복잡했다.  무거운 주제의식에 압도되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어떤 안타까움과 부끄러움의 감정으로 인해 매우 혼란스러웠다.
 
안타까움과 부끄러움의 정체는 케이시 애플렉을 보며 느낀 것이었다. 어떻게 이토록 뛰어나고 재능 있는 배우가 그런 범죄를 저질렀을까 하는 바보 같은 안타까움, 동시에 그의 재능이 아까운 나머지 나도 모르게 그러한 사실들을 - 그의 과오 및 잘못된 전적을 - 부정하고 싶어 하는, 그럼으로써 영화를, 혹은 그의 재능을 즐기는데 방해를 받고 싶어 하지 않는, 방관자로서의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이후로도 몇 번인가 케이시 애플렉이 출연한 영화를 보며 그의 연기에 매료되었는데, 그때마다 성폭력범으로서의 그를 경멸함에도, 경멸하고 싶음에도, 어쩔 수 없이 이끌리고 마는 나의 나약함과 한계를 느끼며, 마음이 꽤나 복잡해졌던 것 같다.
 
물론 개인의 인성과 직업적 재능은 다른 문제다. 성폭력범의 연기에도 충분히 감탄할 수 있고, 가정폭력범이 쓴 시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감동할 수 있다. 예술과 개인의 인생 역시 서로 다른 영역이다. 설령 범죄를 저질렀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아예 별개의 영역인가 하면, 또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매료될 수 있지만, 감탄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불편함 역시 각자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사랑하는 대상의 악을 발견한 뒤 갈등하고 고뇌하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나의 경우는 어디까지나 아무 상관없는, 머나먼 이국의 배우에 대한 작은 경탄, 재능에 대한 호감 정도의 감정에 불과하지만, 그 대상이 아주 가까운 사람이라면 어떠할까. 애인이라면, 친구라면, 부모라면, 더 나아가서 자식이라면. 그 마음이 사랑이라면.
 
몇 달 전, 다문화 가정 출신의 아이가 친구들의 괴롭힘으로 인해 옥상에서 추락해 사망한 일이 있었다. 반성 없는 태도를 보이는 가해 학생들 뿐 아니라 사뭇 당당하기까지 한 그들 부모로 인해 사회적인 공분을 불러일으켰던 사건이다. 부모들은 한결같이 자기 아이에 대한 변명을 하기 급급했다. 실은 뻔하고 흔한 전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운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랑했던 대상이 악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사랑을 유지할 수 있을까? 둘 중 하나의 감정은 싸우다 패배하기 마련이다. 사랑이 멈추거나, 악 자체를 부정하거나. 우리 애는 그런 애 아니에요.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는 강을 끼고 있는 한 소도시에 사는 할머니의 이야기다. 손자와 단 둘이 사는,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다소 주책맞은 보통의 할머니. 어려운 형편에도 다소 과하게 멋을 내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호들갑스럽게 감탄을 하곤 해서 주변 사람을 질리게 하는, 문학강좌에 다니며 언젠가 시를 쓰기를 꿈꾸는, 버스 정류장 옆자리에 앉아 있는데 어머, 꽃이 피었네, 저 꽃 참 예쁘지 않아요? 하고 끊임없이 말을 걸어 네네 하고 건성으로 대답을 하게 만들법한 그런 할머니. 이제 수염이 거뭇하고 여드름 투성이의 중학생 손자는 할머니 눈에 여전히 아기 같기만 하다.
 
어느 날 할머니 앞에 손자 친구의 아버지가 나타나고, 그의 손에 이끌려 모임에 나간 할머니는 손자가 자주 어울리는 친구 5명과 함께 한 여학생을 지속적으로 강간하고, 그로 인해 여자아이가 강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모임에서 부모들(실은 모두 아버지들)의 반응 역시 매우 전형적이다.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났는데 이걸 어떻게 마무리하나, 사건을 몇 명이나 아나, 돈이 얼마나 들까 등등. 그들이 그런 대화를 하는 사이 할머니는 밖으로 나와 시를 쓰려고 한다. 그러면서 잘 써지지 않는다고 고민을 한다. 손자의 범행 사실을 안 직후에 시를 생각하는 그녀의 모습을 본 다른 이들은 뜨악해한다.
 
영화는 성폭력 사건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의 금전적인 갈등과 시가 써지지 않는다는 할머니의 내면적 갈등을 동시에 이끌고 나간다. 피해자 가족과의 합의금을 준비하지 못해 할머니는 다른 아버지들로부터 연신 타박을 듣는 한편, 시 낭독회 등을 계속 쫓아다니며 질문을 하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주변 회원들로부터 눈총을 받기도 한다. 무슨 할머니가 시를 쓴다고 나대 뭐 그런 마음들.

영화 막바지에서 우여곡절 끝에 할머니가 합의금을 마련했음에도 결국 손자는 경찰에게 잡혀가는데, 실은 미성년자가 얽힌 사건의 경우에는 피해 당사자가 고발하지 않더라도 제보가 있으면 형사처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할머니가 손자를 고발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손자를 미워하거나, 손자에 대한 애정이 식은 것은 아니다. 그녀는 끝까지 손자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시종일관 생각 없고 좀 이상한 할머니처럼 묘사되던 그녀였지만, 사실 그녀는 영화에 나오는 그 누구보다도 치열했다. 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해, 피해자에게 사과하기 위해, 여전히 손자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그러면서도 죄책감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시를 쓰기 위해. 실은 누구보다도 자기 인생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몫을 해내기 위해 애썼던 것이다. 그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쓴 시는 자살한 여자아이를 위한 시였다.
 
오래전 친구가 성폭력범이라는 사실을 알고 매우 놀랐던 사람이 있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사실이냐고 되묻던 그는, 처음에는 설마 그런 일이 있었을까 하고 의심스러워하더니, 부정할 수 없는 증거 앞에서, 잘못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대가를 치르는 것은 너무 심한 것 아니냐고 결국 화를 냈다. 그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실망감과 애정 사이에서. 그리고서 결국 애정을 택한 것이다.
 
사랑과 실망, 애정과 경멸이 갈등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종종 한쪽으로 도망친다. 어떤 사람들은 순식간에 사랑을 거두기도 한다. 그러나 감정이라는 것은 쉽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상황이 변했음에도 여전히 남아 우리를 괴롭게 만든다. 그런 경우 많은 이들은 악이 있었던 자체를 부정해버린다. 그러나 용기가 있다면, 불편함의 무게를 견뎌낼 힘이 있다면, 두 가지의 감정은 공존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네스의 노래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다시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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