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승혜 Apr 06. 2019

“절대 강간당하지 않는 사람”

강화길, <다른 사람>

큰 개를 기르고 싶었다. 도베르만이나 셰퍼드처럼 크고 사나운 개. 이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 물었다. 아니 그런 큰 개를 어디서 키우려고? 원래 큰 개 좋아해? 도대체 왜? 걔네들이랑 같이 산책하고 싶어. 그러면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잖아. 그 이야기를 하며 도베르만을 끌고 깜깜한 골목길을 걷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나는 위풍당당했다. 아무도 나에게 다가오지 못했다. 내 앞을 걷던 사람은 개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듣고 움찔 놀라더니 도망쳤다. 그런 장면을 상상하며 나는 빙그레 웃었다. 상상만으로도 흐뭇했다. 왜 기분이 좋은지 그때는 몰랐다.

3년 전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난 뒤, 그에 관한 글을 쓰던 나는 정체모를 기쁨의 근원이 무엇이었는지를 그제야 깨달았다. 그것은 누군가를 공격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위협하고 싶은 마음, 보복하고 싶은 마음, 공포의 대상이 되고 싶은 마음, 그럼으로써 힘과 권력을 누리고 싶은 마음. 그간 나도 모르게 쌓여왔던 두려움과, 분노와, 억울함과, 피해의식을 누군가에게 되갚아주고 싶던 마음이었다.

나는 지긋지긋했다. 중학생 때 등교하던 나를 불러 세운 뒤 자신의 성기를 흔들어대던 남자, 고등학생 때 학교 주변에 자주 출몰하던 성희롱범, 풀숲에서 뛰쳐나와 고등학생이던 내 가슴을 만지고 도망간 남자, 지하철에서 나에게 몸을 비벼댄 뒤 내가 항의하니 그럼 경찰서에 가보자며 따라내리라고 오히려 큰소리를 치던 아저씨, 한밤중에 나에게 카톡을 보내던 옛 직장 상사, 아무렇지 않게 음담패설을 주고받던 직장동료들, 회사 주변에 널린 안마방과 단란주점과 룸살롱 앞을 웃으며 당당하게 드나들던 이들, 겁내는 여성들 모습이 재미있어서 일부러 골목길에서 발걸음 소리를 크게 내며 쫓아가곤 했다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하던 연예인. 나는 그들이 벌벌 떠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공포에 질려 우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랬기에 “그녀가 그렇게 열망하고 노력했던 ‘다른 사람’.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고, 우습게 볼 수 없는 사람. 절대 강간당하지 않는 사람.”이 무슨 말인지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 역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강화길의 소설 <다른 사람>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다른 사람>은 여성들의 이야기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주변의 누군가를 조금씩 닮아 있다. 어둡고 사악한 면까지 포함하여 전부. 하다 못해 전형적인 ‘명예 남성’으로 묘사되는 야심 찬 인물 역시 실은 현실에 굉장히 흔하게 보이는 유형이다. 그들은 절대적인 피해자로만 머물러 있지 않다. 약자를 착취하고, 괴롭히고, 폭력을 가하며, 정당하지 못한 피해의식을 표출하는 동시에 분노와 억울함을 엉뚱한 데에 풀기도 한다. 현실 속 실제의 여성들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다만 소설을 읽다 보면 그들의 행동에 동의하진 못하더라도, 그들이 어떻게 하여 그러한 사고에 도달하게 되었는가를 이해하게 된다. 폭력에 노출되고, 상처를 입고, 강간을 당하고, 그래서 이제는 당할 바에야 차라리 강간을 해버리겠다는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남성들이 “절대 강간당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그럴 수 있기를 바라고는 있지만.

⭐️⭐️⭐️⭐️ 나는 법에 무지했다. 피해자에게 보호조치가 내려질 거라는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접근 금지를 신청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필요했다. 그가 내게 접근하면 안 되는 이유가 증명되어야 했고, 증명에 누군가의 승인이 필요했다. 나는 법을 몰랐다. 재판이 그렇게 오래 걸릴 줄도 몰랐다. 언제든 처벌이 날 거라는 생각으로 기다리다 보니 5개월이 지나가고 있었다. -p.16



그나마도 수진은 입증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만일 그를 고발한다면 수진은 만신창이가 될 것이다. 할머니를 생각해야 했다. 수진의 미래를 생각해야 했다. 강간 피해자로 불리고 싶지 않았다. 강간 피해를 주장했던 사람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하고, 오직 의혹에만 둘러싸여 살고 싶지 않았다. -p.214



그런데 힘들었다. 없었던 일로 하고 싶다고 해서, 정말로 과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수진은 몸이 아팠다. 자주 악몽을 꿨고, 구역질을 했고, 10킬로그램이 빠졌다. 이해할 수 없었다.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죄책감을 느껴야만 하지? -p.228



실수였다고? 그래. 얼마든지 양보해서 실수라고 말해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나야.
왜 내게 실수했어? 너는 내 몸에 실수를 하고 맘 편히 사라졌는데, 왜 내 몸은 그저 실수로 끝나지 않지? 왜 내 몸이 아픈 거지? 왜 네 실수 때문에 내 몸이 찢겨 나가고 뒤틀려야 하지? 수진은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프고, 소문날까 봐 두려워하고, 누구에게 말도 못 하면서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실수라고? 하지만 너는 현규 같은 남자에게는 실수하지 않겠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번역가에게도, 저 교수들에게도, 너는 얌전하고 착한 남학생처럼 앉아 있겠지. 그러면서 무슨 생각을 하니. 창고를 떠올리나? 네가 실수해도 상관없는, 네가 원하는 대로 실수해도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 그 창고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니?
그 창고가 나야? -p.238



그렇게 이강현은 조용히 교수들이 진짜 원하는 걸 찾아다 주고, 그녀가 원하는 걸 받는다. 어떤 자리도 욕심내지 않는 척, 일을 시키면 군소리 없이 실행하는 척, 척척척, 상냥하고 순종적인 여자인 척, 경쟁력이 없는 척, 척척척. 그런데 어느 날부터 사람들이 이강현을 페미니스트라고 불렀다. 이강현은 혼자 깔깔 웃었다. 내가 뭐라고? 꼴페미가 아닌 진정한 페미니스트. 그렇지, 그렇지. 이강현은 자신에게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남자들이 좋아하는 독립적인 여자.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언제든 할 용의가 있고, 남자들이 하는 일에 크게 나서지 않지만 돈을 공평하게 나누어 내고, 음담패설이나 성희롱 가까운 농담에 화내지 않고, 남자들이 2차에 갈 때 눈치껏 빠지며, 최근의 여성운동이 과하다고 지적할 줄 알며, 더 중요한 문제를 봐야 한다고 말하는 페미니스트. 그들이 허락한 페미니즘을 수행하는 페미니스트! 그들은 무엇보다 그녀가 <제인 에어>를 공부한다는 사실을 좋아한다! -p.265-266

매거진의 이전글 답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