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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Oct 10. 2018

말할 수 없는 것을 전달하기 위하여

스티븐 킹의 <사계>를 읽고




스티븐 킹의 <사계>를 읽었다. 사실 이 책을 산 것은 10년 전인 2008년이었다. 당시 어느 귀여운 미남이 무척 재미있다며 추천을 하길래 별 생각 없이 구매했다. 그런데 나는 그의 얼굴은 무척 신뢰하였으나 취향이나 지성은 썩 신뢰하지 않았더랬는지, 사놓고도 도통 읽어볼 마음이 안 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줄곧 책장 속에서 잠자던 책을 올 여름 우연히 다시 한 번 펴보게 되었던 것이다. 책은 가지고만 있으면 언젠가는 읽게 되는 것이 맞는가 보다.

사실 스티븐 킹에 대해서는 오래도록 어떤 편견이 있었다. 종종 그에 대해 조롱이나 비하의 의미로 일컬어지는 공포소설이나 장르소설 작가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나는 공포소설이나 대중소설 역시 아주 좋아한다) 그의 글쓰기 스타일 자체가 지나치게 자세하고 길어서 나와 안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글은 묘사가 상세하고 모든 것이 굉장히 디테일하다. 캐릭터는 엄청나게 입체적이며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도 고려되어 있다. 그의 다른 책인 <유혹하는 글쓰기>를 보면 별 다른 계산이나 치밀한 플롯 없이 그 때 그 때 되는대로 쓴다던데, 어떻게 그토록 빈틈없이 상세한 구성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그런 치밀하고 자세하면서 끊이지 않는 입담은 그의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한데, 재미는 있지만 너무 길다보니 읽는 사람을 지치게 하기도 한다. 더군다나 공포소설에서 그런 상세한 묘사를 보다보면....그랬던지라 스티븐 킹은 영 내 스타일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더 이상은 그의 글을 찾아보지도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사계>를 읽게 되었다. 사계는 스티븐 킹이 그동안 출시하기 애매하여 모아놓은 중단편 소설 네 편을 묶어서 내놓은 ‘단편집’인데 말이 단편집이지, 번역하다보니 그 양이 너무 길어져서 한국어판은 봄-여름/가을-겨울의 두 시리즈로 나뉘어져 나왔다. 소설 네 편이 각각 200-400페이지 가량 된다. 요즘 젊은 작가 시리즈라든가 핀시리즈라든가 하는 한국소설을 보면 크기는 아주 작고 얇으면서 여백은 많게 그럼에도 장편소설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와서 독자에게 책 한권을 읽었다는 뿌듯함을 주곤 하는데, 200페이지가 넘는 소설이 단편이라니요. 스티븐 킹의 투마치토커로서의 면모가 잘 엿보이는 부분이다.

책에는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 <우등생>, <스탠바이미>, <호흡법> 총 네 편의 소설이 실려있는데, 이 중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은 잘 알려져있다시피 영화 <쇼생크 탈출>의 원작이다. 흔히 소설이 영화화 되면 소설이나 영화 둘 중 하나는 반드시 그 재미가 덜해진다고들 한다. 소설 원작의 영화를 보고 실망하는 경우도 있고 영화를 먼저 봤다가 소설에서는 지루함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은 정말 특별하다. 영화는 모두가 인정하듯이 매우 재미있으면서 감동까지 주는 세월을 뛰어넘는 명작인데, 소설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금까지 거의 100번 가까이 보아서 그 세세한 내용을 모두 알고 있는 영화의 내용을 소설 속에서 활자로 다시 만나는 과정이 전혀 지루하지 않다. 영화와 소설이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정말로 드문 경우이다.

다른 세 편의 소설들 역시 매우 훌륭하다. 정말 어느 하나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고, 모두가 알거나 느끼고 있지만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이야기로 풀어내준다. 읽는 사람들 역시 그것이 무엇인지 느끼지만 그 감동을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그것은 어떤 구체적인 것이 아닌 누군가의 인생을 통해서, 즉 이야기를 통해서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에, 구체적이고 짧은 언어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것이다. 스티븐 킹 자신도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고 그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틀림없다. <스탠바이미>에서 주인공은 이야기한다. “제일 중요한 일들은 말하기도 제일 어렵다. 말로 표현하면 시시해지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건일지라도 남들까지 관심을 갖도록 만들기는 쉽지 않다”고.

여름편인 <우등생>과 가을편 <스탠바이미> 역시 영화로도 제작된데다가 재미있으면서도 여러 생각을 하게 해주었지만 네편 중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사실 겨울편인 <호흡법>이었다.

<호흡법>에서는 어느날 회사의 중역으로부터 신비한 사교클럽에 초대받은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처음에는 어색해하며 몸둘 바를 모르다가 점점 사교클럽의 일원으로 익숙해가던 남자는 어느날 크리스마스 모임에서 일원으로부터 아주 신비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한 산부인과 의사가 어떤 여자 환자를 다루었던 이야기였는데....

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누군가가 어떤 관심이나 호감이 있는 대상이 좀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순간을 공들여 묘사하곤 한다.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장면에서 여자의 뒷편은 햇살이 반짝반짝 비치고, 그녀의 머리카락은 금빛으로 빛나며, 뺨은 부드럽고 눈동자는 상냥하게 웃고 있다. 두 사람의 세계에서 세상은 이전과는 달라졌다. 어떤 따뜻한 공기가 두 사람을 감싸안는 그 순간, 둘의 마음 속에는 어떤 강력한 감정이 피어난다. 다름 아닌 사랑이다.  

식구들이 모두 잠든 밤 불을 켜놓고 마지막 챕터를 읽고 있었다. 나는 <호흡법>의 마지막장을 덮으며 가슴 속에 일렁거리는 감정을 주체하기 위해 창밖을 바라보았다. 거실창 너머로 하늘이 깜깜했고 창 밖에는 가로등의 불빛이 깜빡거렸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스티븐 킹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 봄, 여름, 가을편을 거치며 점점 고조되던 관심과 호감이 사랑으로 바뀌게 된 순간이다.

실은 이 책들을 올 여름 프랑스에 갔을 때 읽었는데, 여행 중 정신이 없어 그만 깜빡하고 숙소 중 한 곳에 두고 오고 말았다. 나는 돌아오자마자 서점에 가서 똑같은 책을 다시 구매했다.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네 편 모두 오래도록 반복해서 읽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으면서, 가슴이 벅차오르고, 두근거리며, 설레임까지 주는 한마디로 소설의 진수와도 같은 그런 이야기들이다.


<쇼생크 탈출>

“레드, 잊으면 안 돼. 희망은 무엇보다도 좋은 것이고, 좋은 것은 결코 죽지 않는 법이야.”

<우등생>

“오랫동안 너를 관찰하면서 그 확률을 계산했어. 나는 너란 아이를 알고 있어. 네 성격의 대부분을 잘 알고 있지.... 아니 전부는 아니야. 어떤 인간도 타인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모두 알 수는 없지.”

<스탠바이미>

“제일 중요한 일들은 말하기도 제일 어렵다. 말로 표현하면 시시해지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건일지라도 남들까지 관심을 갖도록 만들기는 쉽지 않다.”

<호흡법>

“그 여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길 건너 매디슨 스퀘어 가든 쪽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더군. 마치 특별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이, 마치 이렇게 냉혹하고 부조리한 세상에서 사람의 의지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듯이... 혹은, 그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겠지만, 이 세상에서 그나마 의미가 있는 것은 오로지 그런 의지뿐이라는 듯이, 중요한 것은 그것뿐이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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