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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May 01. 2019

경험 수집가의 여행

<경험 수집가의 여행>

앤드루 솔로몬의 <경험 수집가의 여행>은 굉장히 특이한 책이다. 표지에 적힌 그대로 지구 곳곳을 장기간 여행한 기록이지만 단순한 여행기와는 다르다. 미술 기자였던 저자는 25년 동안 여러 매체의 의뢰를 받아 세계 각국을 떠돌며 해당 국가의 예술산업과 미술계 동향을 조사한 글을 작성하여 발표한다. 이 책은 당시 발표했던 기사에 더해 작가가 당시에 썼던 글들을 모으고 다듬어 새롭게 발표한 것이다. 미술 관련 기사지만 미술에 대한 글이라고만 할 수도 없는 것이, 해당 국가의 역사적 맥락, 문화적 분위기, 정치적 이슈가 미술계의 동향에 그대로 묻어난다. 그래서 읽다 보면 마치 대단히 잘 정리된 국가별 현대사를 배우고 있는 것 같다.

본래 역사책이나 시대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아무래도 과거에 있었던 사건이 현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직접적으로 연결해서 보여주는 서술이 드물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즉 ‘과거’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경험 수집가의 여행>은 그런 면에 있어 현대의 시점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적 사건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대신 해당 지역 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빌어 과거와 현재가 어떤 맥락으로 이어지는지를 선명히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재미있는 소설이나 여행기를 읽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떤 나라의 문화적 특징과 국가별 사람들의 성격을 파악하려면 꽤 많은 책을 읽으면서 공부하고, 또는 굉장히 장기간 여행을 하거나 거주하면서 몸소 해당 사회의 분위기를 느껴봐야 하는데, 이 <경험 수집가의 여행>은 명료하고 간결하면서도 핵심적으로 해당 국가의 사회적 맥락을 보여주기에, 독자로 하여금 책 한 권을 읽은 것뿐인데도 대단한 것을 경험하고 알게 된 느낌을 받게 만든다. 게다가 국가별 이슈와 거기에서 파생되는 문제점을 보다 보면 현재 우리나라가 직면해 있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하는 기회도 된다.

김명남 번역가의 깔끔한 번역과, 독자로 하여금 직접 다니면서 여행을 하고 취재를 한 듯 느껴지게 만드는 원저자의 훌륭한 글에 더하여, 국가별 역사적 이슈를 임팩트 있게 알게 되고 미술에 관한 지식도 쌓을 수 있다는 점에서 더없이 훌륭한 책. 다만 책이 매우 두꺼운 데다 (700페이지) 쓱쓱 흝어보고 넘길만한 수준이 아니어서 읽는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나만 하더라도 올 초에 나오자마자 읽기 시작했는데 아직 절반 도 채 읽지 못했다. 무척 재미있지만 순식간에 페이지가 넘어가는 그런 류의 책이 아니기에 집에 모셔두고 천천히 조금씩 읽기를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


+++ 남아공 챕터를 읽다 보면 현재 우리나라의 이슈와 연관 지어 많은 부분을 생각하게 된다. 남아공의 경우 아파르트헤이트를 겪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흑인에 대한 여러 정책적 우대가 있었는데, 그런 과정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가난하고 평범한 백인들이 많았다는 것, 무분별한 정책적 우대가 오히려 부작용을 낳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흑백 간에 있었던 유구한 차별이 없어지지 않았으며 여전히 많은 흑인이 고통받는 것 또한 사실이라는 것, 동시에 흑인 문제에 관심을 갖는 많은 백인 예술가들이 굉장히 시혜적인 포인트로 접근하는 통에 오히려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꽤 있다는 것 등등 정치적 작품을 만드는 사람 치고 헤이르스는 충격적일 만큼 둔감해 보인다. 내가 억압에 관해 말을 꺼내자 그는 말했다. “나도 이 나라에서 누구 못지않게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남아공 백인으로 사는 건 엄청 힘듭니다. 돈도 특권도 없이 자랐다면 더 그렇죠.” 그야 물론 남아공 백인이 끊임없이 타인의 고통을 상기하도록 요구받는 것, 공감이 아닌 다른 종류의 슬픔은 누릴 권리가 없다고 규정되는 것은 불쾌하겠지만, 헤이르스의 삶이 다른 수많은 남아공 사람들만큼 어려웠다고는 할 수 없다. 이렇게 자신의 불행을 경쟁적으로 과장하는 태도는 대단히 심란하다. -p.214-215, 남아공의 예술가들: 분리된, 그러나 등한 현재 남아공의 유색인들에게는 백인들이 누리는 특권도, 많은 흑인들이 누리는 자아 실현의 기회도 없다. 일부 유색인들은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누렸던 알량한 특권에 여태 매달린다. 유색인들은 (제법 많은 흑인들처럼) 뻔뻔하게 파괴적인 태도를 보이기에는 가진 것이 너무 많고, (대부분의 백인들처럼) 잘살기에는 가진 것이 너무 적다. 이 인구는 한 방향이 아니라 두 방향으로 두려워한다. -p.230, 남아공의 예술가들: 분리된, 그러 동등한 그가 스스로를 위해서 작업하는 것은 사실일지라도, 그의 작품을 사는 구매자는 모두 백인이다. 진보주의자들은 그의 작품이 좋기 때문에, 또 그것을 구매하면 자신들의 책임감이 덜어지기 때문에 산다. 현재의 토양에서 백인 수집가들이 원하는 것은 비백인 예술가가 자신의 고통을 표현한 작품이다. -p.230-231, 남아공의 예술가들: 분리된, 그러 동등한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해서 이만하면 됐다는 식의 타협적인 반응은 있을 수 없을 것이고, 백인들이 이처럼 속죄하려는 것은 당연히 칭찬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예술가라는 의견, 모든 사람의 목소리가 다 들려야 한다는 의견은 다양성을 칭송하는 일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개인성을 부정하는 이다.
모든 사람들이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동등하게 중요하다고 단언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할 말이 있고 그 말들이 모두 동등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협화음을 끌어낼 따름이다. 천 개의 목소리를 동시에 들으면서 개개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는 취사선택해야만 한다. -p.236, 남아공의 예술가들: 분리된, 그러 동등한 남아공에서는 누구도 아파르트헤이트 이외에는 무엇에 대해서든 한심하다는 생각을 공개적으로 털어놓지 않는데, 지금 그 나라에서 잘못 돌아가는 일이 무엇이든 그것보다야 아파르트헤이트가 훨씬 더 나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가 상징적 존중을 표하느라 쓸데없는 연극에 들이는 시간이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는 있다.  -p.238, 남아공의 예술가들: 분리된, 그러나 동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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