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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May 02. 2019

아내를 원했던 여성들

영화 <엘리자베스 비숍의 연인>

어디서 봤는지는 잊었는데, 혹시 다시 결혼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에 고현정 씨가 이런 대답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결혼은 됐다고. 대신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 말에 주위에 있던 다른 여성들 역시 자신도 그런 생각을 한 적 있다면서, 정말이지 맞는 말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이런 뜻이다. 살림을 알뜰히 꾸려 나의 보금자리를 청결하게 유지하고, 일하고 돌아와 지친 나의 몸을 따스하게 품어주고, 나를 꼭 닮은 아이를 낳아 사랑으로 키워주며, ‘바깥 생활’을 하는 내가 바람이라도 날까 봐 전전긍긍 오매불망 나를 바라보는 동시에, 늘 내 편이 되어 따스하게 나를 위로해주는, 동시에 자신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밖에서 돈을 벌어오는 나를 우러러보는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


물론 이는 아내라는 단어가 연상시키는 느낌이 그렇다는 것 뿐이다. 현실에 이런 아내는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엄마’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우리가 즉각적으로 자애롭고 절대적인 보호자와 같은 이미지를 연상하는데 반해 실제로는 대다수의 엄마들이 그것과 상당히 거리가 먼 것처럼.

가끔 일부의 남성들이 위와 같은 여성이 이상형이라고, 그런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고 밝히면(그러면서도 계속 직장을 다니며 돈을 벌어오는 것은 물론이며!) 뜨거운 비난을 받곤 하는데, 실은 그렇게까지 욕먹을만한 사안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보살펴주고, 육체적 정신적 욕망을 충족시켜주며, 소소하지만 귀찮은 모든 일들을 처리해주면서도, 나의 권위를 살려주고 우러러보는 대상을 거부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것은 굉장히 당연한 욕망이자 욕구인 것이다. 일은 안 하면서 돈은 벌고 싶고, 공부는 안 해도 시험은 잘 보고 싶은 것과 같이, 인간의 보편적이면서 본능적인 욕망.


다만 이러한 욕구를 당당하게 드러내는 남성들의 경우, 이것이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적인 소망이라는 것, 결국 오늘날의 많은 여성들 역시 같은 선상에서 남편보다는 ‘아내’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주 잊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겠지만.

<엘리자베스 비숍의 연인>은 말하자면 ‘아내를 원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다.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 브라질 영화는 미국의 위대한 시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엘리자베스 비숍의 생애를 다룬다. 생애라고는 하지만 그녀의 연인이었던 로타 수아레스와의 러브스토리가 주된 서사이다.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던 비숍은 친구의 초청을 받아 브라질의 리우 데 자이네루로 여행을 떠난다. 학창 시절부터 알고 지낸 오랜 친구 메리는 동성 연인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운명의 여신이 얼마나 잔인한지, 비숍은 거기서 그만 친구의 연인이었던 수아레스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유명한 정치인의 딸이자 부유한 재력가, 동시에 재능 있는 건축가로 활동 중이었던 수아레스는 비숍에게 브라질을 떠나지 않고 계속 남아있도록 설득한 후, 그녀가 작품 활동에 전념하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하고, 비숍은 그곳에서 쓴 시로 퓰리처 상을 받는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았던 두 사람의 관계는 비숍이 뉴욕대의 초청을 받아 브라질을 떠나면서 15년 만에 깨어지고 만다.

영문과 출신이지만 비숍은 배운 적이 없어 잘 모르는 데다가 (실은 배웠는데 까먹었을 확률이 높다) 제목도 그다지 끌리지 않고 사전 정보도 별로 없었던 이 작품을 아무런 기대 없이 봤다가 완전히 홀딱 빠지고 말았다. 너무 좋았기 때문에 이 감동과 감각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도 보게 만들 수 있을지 되려 고민이 될 정도였다.


영화는 문학과 인생, 예술과 불행, 사랑의 기쁨과 슬픔, 상실의 방법,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 이상과 현실의 대립 등 우리가 인생에서 마주하게 되는 많은 갈등을 절묘하게 엮어 풀어낸다. 영화를 보면서 생각한 많은 것들 중 무엇을 이야기할까 고민하다가, 서로가 아내를 원했던 두 연인의 이야기를 해 보기로 했다.

실제의 수아레스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영화 속의 수아레스는 남성보다도 더 남성 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바지 정장에 질끈 묶은 꽁지머리를 한 그녀는 늘 자신만만하며 거침이 없다. 타고난 부와 재능을 바탕으로 정치권에도 영향력이 있는 그녀는 집 밖에서는 남성들을 통솔하며 사업을 이끌고 집안에서는 자애롭지만 권위적인 가장으로 군림한다.


그녀는 비숍과 사랑에 빠진 이후에도 옛 연인 메리와 새로운 사랑인 비숍 어느 쪽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메리가 떠나려 할 때는 네가 그토록 원하던 아이를 기르게 해 주겠다며 달래는 한편, 어떻게 자신과 만나면서 메리와의 관계도 계속 유지할 수 있느냐고 혼란스러워하는 비숍에게는 오랜 인연을 그렇게 쉽게 버릴 수는 없다며 단호하게 대처한다. 결국 세 사람은 한 집까지는 아니지만 수아레스의 영향력 아래서 함께 살아가게 되는데, 이 장면들은 마치 조선시대 궁중 사극이나 옛 중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부유한 남성이 여러 명의 여성을 거느리던 모습에 오버랩된다.


이와 같이 비록 여성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가부장적인 수아레스는 비숍의 예술에는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지만, 동시에 작업실의 인테리어와 같은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까지 그녀를 통제하려 한다. 또한 일이나 사교로 바빠서 곁에 머무를 수 없는 순간까지도 언제 돌아가도 만날 수 있도록 비숍이 집 안에서 초를 켜고 자신을 기다려주길 기대한다.

욕망의 측면에서는 비숍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일찌감치 아버지가 죽고, 그로 인해 정신질환에 시달리던 어머니가 강제로 병원에 끌려가는 모습을 본 비숍에게는 인생이 늘 두려움이자 고통의 연속이다. 심지어 대학 시절의 연인이 비숍에게 청혼을 거절당했단 이유로 자살한 뒤 그녀의 관계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커진다. 평생을 이 곳 저곳을 떠돌며 마음 붙일 곳 없이 지내온 비숍은 누군가 늘 자신의 곁에 머무르며 자신을 정서적으로 지탱해주길 원한다.


그 욕망이 너무나도 강한 나머지 아주 사소한 불안과 고독도 견디지 못하며, 조금이라도 두려운 순간에는 술을 마셔 결국 알코올 중독 상태에 이른다. 수아레스는 물질적으로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지만 동시에 일 때문에 바빠 자주 자리를 비우고 또 다른 옛 연인인 메리와 지속적으로 함께 등장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비숍은 자주 절망에 빠진다.


물론 비숍이라고 늘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퓰리처상 수상 이후 시인으로 명성을 날리게 된 비숍은 온갖 행사와 파티에 초청받고 지속적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데, 그럴 때 수아레스를 대하는 비숍의 모습은 마치 바쁜 가장과도 같다. 행사 내내 한쪽 구석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방 안에서 술에 취해 홀로 잠이 든 수아레스의 귓가에 비숍은 사랑한다고 속삭인다.

이 둘의 관계는 상당히 기묘한 것이, 서로 너무나 사랑하면서도 둘이 동시에 온전히 행복한 순간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수아레스가 행복한 순간에 비숍은 결핍을 느끼고, 비숍이 행복한 순간에 수아레스 역시 고독을 경험한다. 이것은 상대의 성공이나 행복에 대한 질투와는 조금 다른 감정인데, 상대의 집중력과 감정이 자신이 아닌 다른 곳으로 흩어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비숍이 뉴욕대의 초청을 받아 한 학기 동안 미국에 다녀오겠다고 하자 수아레스는 몹시 분개한다. 네가 너에게 어떻게 해줬는데! 얼마나 물질적인 지원을 해줬는데! 너를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고 네 커리어를 어떻게 이끌어줬는데! 어떻게 감히 나를 거스르겠다는 이야기를 할 수가 있느냐고. 비록 한 학기라는 임시의 기간이었음에도 그녀는 비숍이 잠시라도 자신을 벗어나 온전한 한 명의 사람으로 있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비숍 역시 자신의 커리어와 별개로 사업에 승승장구하면서 자신 곁을 자주 떠나 있는 수아레스를 점점 견디기 어려워한다. 재능 있고 아름다운 두 연인이 서로를 지독히 사랑함에도 끝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고 만 것은, 결국 두 사람 다 아내와 같은 존재를 갈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두 연인 간의 관계를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의 원천적 모순뿐만 아니라 친구가 자신의 연인과 사랑에 빠져 절망을 느꼈음에도 생계를 비롯한 여러 문제로 끝내 수아레스를 떠나지 못하며 그럼에도 수아레스에 대한 마음을 단념하지 못하는 메리의 상황을 통해 경제적 종속과 관계의 종속에 대한 사유를 비롯하여, 브라질 독재 정권에 대한 쿠데타가 일어나며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는 악한 민주주의와 선한 쿠데타와 같은 모순된 개념의 대립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들며, 어지간한 남성들 이상으로 활약하던 수아레스였음에도, 남성들의 세계에 결국 편입하지 못한 채 버려지는 모습에서는 젠더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비숍이 그토록 훌륭하고 아름다운 시를 써낼 수 있었던 것이 역설적으로 그녀의 인생이 상실로 점철된 불행하고 고독한 삶이었다는 데서 위대한 예술과 행복한 인생 사이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약간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토록 많은 이슈를 두루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퀴어에 대한 언급은 없다는 것이다. 즉 동성 커플이 주인공이므로 퀴어 영화이지만, 한편으로는 퀴어 영화 특유의 느낌이 전혀 없다는 부분이다. 이 영화에서는 퀴어를 다루는 일반적인 다른 영화들과 다르게, 동성커플에 대한 사회적인 억압이나 갈등이 전혀 제시되지 않는다. 비숍과 수아레스를 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둘의 관계에 대해 그토록 자연스러울 수가 없다.


아마도 수아레스와 비숍 모두 여성이자 퀴어임에도 정치적 사회적으로 어떤 권력을 지닌, 약자라기보다는 강자였기 때문에 실제로 그러했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좋은 퀴어영화란 ‘퀴어’라는 것에서 오는 갈등을 부각하는 것이 좋을지, 혹은 아예 그것이 없이 다른 비 퀴어 영화처럼 구분 없이 다루는 것이 좋을지 하는 고민을 잠시 했었더 순간.

모든 인상적인 장면 가운데에서도 내게 있어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수아레스와 비숍이 사랑에 빠지는 부분이다. 사실 수아레스는 처음에는 비숍을 대단히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사람들을 꺼리고, 부자연스럽게 행동하며, 팬이라고 시를 낭송해달라는 부탁을 매정하게 거절하는 비숍을 두고 수아레스는 그녀가 매우 오만하고, 독선적이며, 속물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빨리 비숍을 내보내지 못해 안달하던 수아레스는 메리의 부탁으로 안간힘을 쓰며 참아보지만, 결국은 견디다 못해 방으로 찾아가 비숍을 비난한다. 대체 저녁시간에 당신의 팬이라는 사람들이 시 낭송을 부탁했을 때 거절했냐고, 너무나 무례한 행동이었다고.


비숍은 이야기한다. 자기의 결과물에 너무도 자신만만해하고 만족스러워하는 당신이 부럽다고. 난 내 작품이 부끄럽다고. 난 내 자신이 싫고 두렵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수아레스는 비숍의 냉담함 뒤에 숨겨진 연약함과, 거만함 뒤에 숨겨진 수줍음과, 그녀가 지닌 고독과 외로움을 알아본다. 타인이 보지 못하는, 오해하는, 설령 오해가 아니라 진실이라 할지라도 그 이면의 어떠한 것을 알아보는 것.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결국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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