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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May 10. 2019

당신의 사소한 사정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얼마 전 흥미로운 뉴스를 봤다. 이태원의 한 술집에서 어떤 40대 여성이 난동을 피우다 징역 2년형을 받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여성은 무려 2년 동안 15차례에 걸쳐 매번 같은 가게에 출몰하여 손님들 술을 빼앗아 마시고 술병을 던지는 등 소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경찰서에 끌려간 뒤에는 차고 있던 생리대를 벗어서 책상 위로 집어던지고 경찰관의 허벅지를 깨물기도 하면서 온갖 행패를 부렸다고.

흔한 취객 난동 사건이 뉴스거리가 된 이유는 아마도 피 묻은 생리대를 벗어서 던졌다는 다소 엽기적인 행각 때문일 것이다. 별 일도 다 있네, 하고 웃고 넘긴 뒤 그냥 잊어버렸는데, 얼마 전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다가 문득 이 기사가 다시 생각났다.
 
영화에서 심장병 진단을 받은 뒤 정부에서 주는 질병수당으로 생활하던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는 어느 날 수당이 끊길 위기에 처한다. 이유는 그가 정부가 만든 질문지의 요건을 충족시킬 만큼 아프지 않다는 것. 양 팔을 머리 위로 들 수 있습니까, 혼자 식사를 할 수 있습니까, 두 다리로 걸을 수 있습니까, 등의 질문에 심장병인 자신이 해당될 리 없지 않냐고 항변해봤자 소용없다. ‘전문가’가 만들었다고 하는 이 규격화된 질문지는 개개인마다 다른 증상을 일일이 고려해주지 않는다.
 
결국 다니엘 블레이크는 수급이 중지될 것이라는 통보를 받고, 의사의 소견서를 받아 항고를 시도한다. 그러나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담당자의 전화를 받아서, 서면 통지를 기다린 뒤, 그것을 확인한 이후에, 인터넷으로 접수를 해서, 대기를 하다가, 차례가 돌아오면 다시 재심사를 받으면 된다고. 하지만 전화 한 통 하는데도 3시간 가까이 대기해야 하는 데다가, 목수로 일하며 평생 몸 쓰는 일만 해온 터라 인터넷 사용법조차 제대로 모르는 다니엘 블레이크에게 이와 같은 관료제의 절차는 너무도 막막하고 지난한 과정들이다.
 
온갖 우여곡절을 겪다가 결국 폭발하고 만 다니엘 블레이크는 복지사와 상담하다 말고 밖으로 나와 기관의 벽에 커다랗게 낙서를 한다. “굶어 죽기 전에 항고일 배정을 요구한다!! 구린 통화 대기음도 바꿔라!!” 그러는 사이 기관의 직원이 나와 그에게 화를 내며 말한다. “제발 단 한순간 만이라도 생각 좀 하고 행동할 수 없어요!!!!” 생리대를 집어던졌다던 그 여성을 문득 떠올렸던 것은 바로 이 장면 때문이었다.
 
물론 다니엘 블레이크과 취객 사이에는 전혀 공통점이 없다. 다니엘 블레이크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고, 여성은 그냥 이상한 사람이었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미친 사람이 아니며 그렇게 행동하는 ‘나름’의 이유를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영화를 보며 그간의 맥락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 난리를 피웠던 여성에게도 어쩌면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물론 정말로 그냥 미쳤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지만, 사실은 미치는 데에도 이유는 있는 법이니까.
 
하여간 이 <나,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영화를 보다 보면 참으로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 영화와 소설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어떤 훌륭한 이야기를 마주할 때 느끼게 되는 원초적인 기쁨, 동시에 성실하고 선량한 개인들이 시스템과 사회 앞에 무력한 모습을 바라볼 때 겪게 되는 안타까움과 고통. 특히 또 다른 주인공 케이티는 왜 우리 사회의 누군가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행복해질 수 없는지를 그야말로 낱낱이 보여주는 인물이다.
 
두 아이를 홀로 키우며 단칸방에 살아가던 싱글맘 케이티는 둘째가 스트레스로 이상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이사를 결심한다. 그녀는 어렵사리 방이 두 개 있는 집을 얻었지만 새로운 동네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정부의 수급대상 심사에서 단칼에 잘린다. 청소일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돈은 끝없이 모자라고, 세 식구는 전기도 난방도 되지 않는 집에서 벌벌 떨며 산다. 식사는 턱도 없이 부실하지만 그나마도 그것은 아이들 몫일뿐, 아이들에게 음식을 모두 양보하고 내내 굶으며 버티던 케이티는 오랜 굶주린 끝에 식료품 지원센터의 통조림을 허겁지겁 뜯어먹다 울음을 터뜨리고, 결국 운동화 밑창이 뜯어졌다는 이유로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는 첫째의 이야기를 들은 날 밤, 성매매를 하기로 결심한다.
 
영화에서 케이티가 성매매에 이르게 되는 과정은 오늘날 빈곤계층의 여성 서사를 대변한다. 일을 해야 하는데 애들을 봐줄 사람은 없고, 그러면서 엄마로서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비난받고, 아무리 일을 해도 돈은 부족하고, 저임금 고강도의 노동을 하며 버텨보려 하지만 주변에서는 몸이라도 팔지 그 좋은 거 뒀다 어디다 써먹느냐는 책망을 듣고, 결국 견디다 못해 성매매에 도달하면 또 다른 비난을 받게 되는 서사.

물론 영화가 여성의 서사에 더 집중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여기 등장하는 사람은 성별에 관계없이 모두 힘들고 대부분 선량하다. 하다못해 중국에서 짝퉁 나이키를 몰래 들여와서 파는 청년조차 선량하다. 그의 사업 파트너인 중국인 또한 선량하다. 주인공인 다니엘 블레이크는 일면식도 없던 케이티와 안면을 튼 이후 그녀를 딸처럼 생각해 마음을 쓰고 돌봐줄 만큼 착하고 친절하다.

다니엘은 케이티의 집을 대가 없이 수리해주고 아이들은 자신의 손주처럼 케어하는 것은 물론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기꺼이 손을 빌려준다. 케이티와 아이들 또한 다니엘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사랑한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이것이 현실이 아닌 영화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답답한 시스템 속 너무도 선량하고 무해한 개인들의 분투, 그리고 그들 간의 진심 어린 연대.
 
나는 영화 속 다니엘 블레이크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그를 위해 뭔가 하려고 애쓰는 주변인들의 모습과 생리대를 훔치다 걸린 케이티를 동정하여 그냥 봐주는 마트 직원의 모습이 거의 있을 수 없는 모습이라고 느꼈다. 아주 아주 드물게 있을 수는 있지만 영화에서처럼 빈번하게 있는 일은 아니라고.

물론 이 역시 지나치게 현실을 악의적으로 바라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실제의 상황이었다면 다니엘 블레이크는 주변의 누군가에 의해 진작 사기를 당했을 확률이 높고, 케이티 역시 본인이 성매매를 하기로 결심하기 전에 마트 직원에게 진작 협박을 당해 성적 착취를 당하거나 더 크게 망신을 당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다 떠나서 일단 케이티와 다니엘 사이에 물질적인 대가 없이 순전히 ‘마음’만으로 이처럼 돈독한 관계가 유지되는 것부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가난하고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말하자면 타인에게 선의를 베풀고 마음을 나누는 것도 시스템이 뒷받침될 때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자원이 한정되고 각박한 상태에서 사람들은 타인에게 친절하기 힘들다. 간혹 나를 믿거나 신뢰를 보이거나 선량한 사람을 마주치는 기회가 생길 경우 자신도 모르게 유혹에 빠지게 된다. 그들을 벗겨 먹거나, 사기를 치거나, 착취하겠다는.

그런 유혹에서 벗어나려면 일부러 애를 써야 하며 그렇게까지 가지 않더라도 상대를 믿을 수는 없다. 내가 속이지 않더라도 상대가 나를 속일 수 있으므로 늘 신경을 곤두세우며 지내야 한다. 국가와 사회가 나를 보호해주지 않는 세계에서 믿을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 시스템이 무너질수록 구성원들이 각자도생 하려는 경향은 점차 강해진다. 불신과 배반의 경험은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먹히기 전에 먹자, 는 생각으로.
 
영화를 보며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지만, 한편으로 어떤 사람들에겐 이 영화가 어쩌면 가난하고 힘없는 변명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심장병이 걸렸든 뭐든 더 이상 일을 못하는 것은 사실이잖아요? 그 나이 되도록 인터넷도 안 배우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잖아요? 모든 사람을 국가가 일일이 챙겨줄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능력도 없는데 애를 무책임하게 낳아놓은 것 또한 사실이잖아요? 안타깝긴 하지만 자기가 무능력한 걸 뭐 사회가 어찌해줄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들의 말 또한 맞다. 어쩌면 그것은 사실이다. 인생에 있어서 어떤 실수를 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고, 아프고, 무능력하고, 어리석고. 그들이 그러한 처지에 놓이기까지의 과정은 남들이 볼 때는 모두 개인의 사정일 뿐이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너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있는.

그러나 나는 타인의 사정을 이해하는, 설령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한 명씩 늘어날 때마다, 우리가 조금 더 나아질 것이라는, 당장은 나와 관계없는 타인에 대해 쓰는 어떤 마음들이 길게는 우리 자신을 위하는 것이라는, 그런 생각을 자주 한다.
 

*
<당신의 사소한 사정>은 황현산 선생님의 에세이 제목에서 따 왔다. 아래는 그 에세이 중 일부.
 
“우리들 개인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가 저 큰 목소리들 앞에서는 항상 ‘당신의 사정’이다. 소작농이 수확의 7할을 지대로 내놓아야 했던 것도 당신의 사정이고, 없던 도로가 뚫려 한 마을이 두 마을로 나뉘어 살아야 하는 것도 당신의 사정이고, 그 끔찍했던 입시 공부를 자식에게 다시 강요해야 하는 것도 당신의 사정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실패의 순간마다 변화한다. 사람들마다 하나씩 안고 있는 이 사소한 당신의 사정들이 실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사정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어딘가에는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 바로 그 변화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있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것 같은 큰 목소리에서 우리는 소외되어 있지만, 외따로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당신의 사정으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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