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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May 14. 2019

배우의 탄생

영화 <증인>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 정우성은 ‘믿고 거르는 배우’ 중의 한 명이었다. 아, 오해는 금물. 나는 정우성 씨를 너무나도 좋아한다. 그의 외모, 그의 미소, 그의 성정, 그의 태도. 사실 대한민국 여성 중에 정우성 씨를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다만 그의 연기를 좋아하지 않을 뿐.

그가 지닌 것 중에 유일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다름 아닌 그의 연기였다. 배우에게 유일하게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연기라니, 너무 슬픈 이야기다. 하지만 그가 출연한 영화들이 전부 다 재미가 없는데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재작년 나왔던 <강철비>에서는 많이 좋아졌다고 다들 칭찬하던데, 내게는 여전히 많이 아쉬웠었다.  

그렇기에 그가 이번에 백상 예술대상에서 영화 <증인>으로 대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물론 이전에 비해 연기가 좋아질 수는 있지만, 대상이라굽쇼? 그래서 보게 되었다. 영화 <증인>을. 대체 얼마나 잘하길래 대상을 받았다는 거야.

<증인>은 사실 굉장히 뻔한 이야기다. 특히나 법정물을 많이 본 사람이라면 영화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후의 전개를 어렵지 않게 예상 가능하다. 이제는 적당히 자리도 잡고 때가 좀 묻어도 개의치 않아할 듯한 중년 변호사가 억울한 피의자를 구하기 위해 바보 같은 증인을 심문하다 감추어진 진실을 깨닫고 갈등하는 서사를 말이다.

영화 <증인> 속 양순호(정우성)는 과거 민변에서 오래 활동했으나 세상의 벽을 느끼고 좌절하다 결국 대형 로펌으로 이직한 인물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에게도 나름의 사정은 있다. 아버지는 살짝 치매기를 보이며, 친구에게 속 좋게 보증을 서줘서 갚을 수 없는 빚을 사정없이 늘려놓기까지 했다. 아들인 그로서는 돈을 벌고 성공해야만 하는 절박한 입장인 것이다. 세상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것, 사람들이 그리 선량하지만도 않다는 것, 바꾸려고 애를 쓰고 뛰어다녀봤자 실은 별반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것을, 그는 이제 깨달아버렸다.

그랬던 그가 살인사건의 유일한 증인으로 알려진 자폐아 지우를 만나며 조금씩 달라진다. 처음에는 유리한 정보를 얻어내기 위한 전술적 접근이었으나 아이의 마음을 열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하는 사이, 저도 모르게 조금씩 변화한다. 실은 변하는 것보다 잊고 지냈던 본연의 모습을 다시 찾아가는 것에 가깝지만. 그렇기에 사건을 거의 승리로 이끌었던 그는 마지막에 모든 것을 내던지고 큰 희생을 감행한다. 성공이 그야말로 눈 앞에 다가오던 시점에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사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영화는 이야기로서는 두 가지 단점을 가지고 있는데, 우선은 굉장히 평이하다는 것이 있다. 왜냐하면 한 소시민적인 인물이 영웅으로 진화하는 이야기는 널리고 널렸으니까. 정의감에 불타던 변호사가 현실에 눈을 떠 마음을 고쳐먹은 뒤 마침내 승승장구할 기회가 도래했는데 정의감 때문에 모든 기회를 걷어찬다? 흔해빠진 클리셰도 이만한 것이 없다.

한편, 매우 흔한 클리셰인 동시에 현실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대체 우리 주변에 저런 사람이 있기나 한가.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오랫동안 비리와 부패가 판치는 세상을 살았고, 정직하고 솔직하면 손해라는 것을 보고 자랐고, 그렇기에 나서서 나쁜 짓을 하지는 않더라도 적극적으로 선한 일을 하려고도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어 왔다. 영화나 드라마 혹은 소설이 현실에 없는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그것도 정도껏이지, 관객 입장에서는 이건 말 그대로 너무 지나친 환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다가 문득 관객들은 깨닫게 된다. 우리가 그 환상을 지금 눈 앞에서 보고 있음을. 바로 정우성이라는 한 인물을 통해서 말이다. 극 중의 양순호는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의 편견을 시인하고, 잘못을 인정하고, 달라지겠다는 다짐을 표명한다. 최근의 정우성은 공개석상에서 난민 관련 적극적으로 옹호 발언을 하고, 페미니즘적으로 특정 발언(여배우는 꽃)이 비판받자 적극 수용하고 사과하는 한편, 사회와 타인에 대해 끊임없는 관심을 표현해 왔다. 그 발언으로 인하여 대중이 자신에게 돌을 던지고 비난을 한다 하더라도. 결국 극 중 양순호라는 인물은 실은 정우성이라는 사람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그의 연기는 이전과는 정말로 달라져 있었다. 그전까지는 무언가를 흉내 내는 느낌에 가까웠다면, 또는 연기를 위한 연기였다면, 혹은 잘생긴 얼굴로 그저 그 역할을 때우는 정도에 불과했다면, 이번에는 말 그대로 극 중의 인물이 되어 있었다. 이런 뻔한 줄거리의 영화가 이토록 훌륭한 완성도로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정우성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우성이 아닌 다른 배우였다면, 이런 느낌을 낼 수 없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의 연기를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가 난민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무렵, 사람들은 궁금해하곤 했다. 도대체 왜 정우성이 난민 얘기를? 하는 그런 의문들 말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나는 그가 처음부터 선량한 사람이어서, 처음부터 깨어 있는 사람이어서, 처음부터 남달리 정의감이 특출 나서  난민이나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잘생기고, 주목을 받고, 세상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그에게도 역시 콤플렉스는 있었을 것이다. 흔히 그를 두고 사람들은 이야기하곤 했다. 연기만 빼면 완벽하신 분. 배우에게 연기만 빼면이라니... 실은 위에서 나 역시 그렇게 이야기하긴 했지만, 그리고 그럼에도 그를 진정으로 좋아하지만, 어쨌든 배우로서는 어떤 열등감이나 열패감이 생기기에 충분하고 넘치는 문제인 것이다. 더구나 연기에 욕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나는 그가 연기 때문에 꽤나 좌절을 겪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던 중, 어떤 인정 욕구나 자아실현이나 혹은 심정적 안정이나, 어쨌든 연기가 아닌 좀 다른 것에 관심을 쏟기 위한 차원에서 난민이나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런데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점차 거기에서 ‘진짜로’ 의미를 찾게 되었고, 역설적으로 그게 그 안의 어떤 부분을 진짜로 변화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예전의 그의 연기가 말 그대로 무언가를 흉내 내고 모방하는 것에 불과했다면, 난민 이슈를 겪고, 그들을 위해 고민하고, 싸우고, 목소리를 높이고, 가슴 아파하던 그는 이제 진짜로 타인을 이해할 준비가 된 어떤 사람이 된 것인지 모른다고. 그것이 그의 연기가 좋아진 이유일 것이라고. 영화 <증인>을 보며 그런 생각들을 했다.

많은 이들이 위선을 비판하는 모습을 본다. 누구나 속은 다 나쁜데, 그걸 그대로 드러내는 놈보다, 속은 똑같이 나쁘면서 겉으로는 착한 척하는 위선자가 더 나쁘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우리는 본래 이기적인 생물이다. 각자의 욕구를 위해 움직이고 자기 자신을 최우선시하며 살아가는. 그렇기에 겉으로 옳은 말을 하고, 번드르르한 이야기를 하고, 행동과 다른 말을 하는 모습들이 우습고 역겹다고 말하는 이들의 마음 또한 이해한다. 그렇지만, 나는 타인을 이해하는 척하는, 이해하지 못해도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그 과정 속에서 가끔씩은 우리 안의 무언가가 진짜로 변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정우성이라는 한 사람을 통해서 다시금 본다.

영화 마지막에서 양순호는 증인이었던 지우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우야 잘했어, 넌 누구보다도 훌륭한 증인이 돼줬어. 나 역시 정우성 씨에게 말하고 싶었다. 이 영화에서 당신은 누구보다도 훌륭한 배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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