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승혜 May 15. 2019

육식동물로서의 여성

영화 <엘르>



폴 버호벤 감독이 연출한 <엘르>는 참 이상한 영화다. 대개의 소설이나 영화는 등장인물이 어째서 그런 행동을 하는지를 독자나 관객에게 납득시키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관객들은 인물을 이해하고, 그에 이입함으로써 이야기에 빠져든다. 그러나 영화 <엘르>는 그런 이야기의 구조를 완벽하게 뒤집는다. 아무것도 설명하려 하지 않고, 아무것도 납득시키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관객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주인공이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왜 저렇게 느끼는지, 왜 저러한 사고에 도달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나 역시 영화를 보는 내내 혼란스러웠다. 왜 주인공 미셸은 성폭행을 당하고도 신고하지 않는가, 왜 사랑하는 친구의 남편과 바람을 피우는가, 왜 전남편에 대한 감정이 있으면서도 그와 다시 잘해나가려 하지 않는가, 왜 그 와중에 옆집 남자까지 유혹하려 드는가, 왜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으면서 그에게 찾아가는가, 왜 바람이 끝난 뒤에 일부러 친구에게 진실을 알리는가,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미셸이 강간을 당한 뒤 아무렇지 않은 척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에서, 피해자의 위치에 놓여 ‘약자’ 취급당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가도, 그 범인의 정체를 알게 된 뒤에도 여전히 그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보고선 다시 혼란을 느끼고, 그래서 그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 것인가 추측하면, 또다시 그를 파멸로 몰아넣고 하는 식으로 예상이 주기적으로 빗나가면서, 뭐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러닝타임 내내 반복되는 이러한 과정들로 인해 관객은 혼란을 느끼며 대체 이 영화가 말하려는 게 무엇인가 싶지만, 사실 이것은 영화가 정확히 의도하는 바이기도 하다. 혼란, 무질서, 규정되지 않은 어떠한 유기체로서의 여성. 스테레오 타입과 전형성에서 벗어나는 지배자로서의 여성. 사냥을 당하기보다 사냥을 하는, 그러면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서사를 자유롭게 오고 가는 여성. 이러한 세계에서 저 여자는 대체 왜 저럴까, 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해진다. 그냥. 그러고 싶으니까.

 

이전까지 많은 영화에서 여성 주인공은 주로 피해자나 약자로 서술되고는 했었다.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로 나오는 경우에는 팜므파탈이 되어 남성을 유혹해서 함정에 빠트리는 역할을 맡았고. 그런 면에서 <엘르>의 미셸은 이전까지는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여성상이다. 그녀는 여성이면서 누구보다도 남성적이다. 흔히 현실 세계에서 여성은 초식동물, 남성은 육식동물로 규정되지만, 영화 속 미셸은 그야말로 사납고 날렵한 한 마리의 육식동물이다. 그러나 여전히 남성과는 사뭇 다른. 말하자면 육식동물로서의 여성인 것이다.

 

그녀를 지배하는 가장 큰 욕구는 지배욕이다. 그녀는 모든 일에서 자기 자신이 최우선이자, 그 누구라도 자기가 아닌 다른 것에 관심을 쏟는 건 참지 못하는 나르시시스트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남편을 여전히 사랑하지만 과거 자신에게 손을 댔다는 이유로 그를 끝내 용서하지 못하며, 한편 그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싶기에 그가 새로운 사랑을 찾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방해한다. 그녀는 또한 친구를 너무나 사랑함에도 그녀의 남편과 바람을 피우며, 그 와중에 그에게 질려서는 그가 매달림에도 먼저 이별을 고하고, 자신에게서 벗어나 아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를 본 뒤에는 일부러 친구를 불러내 불륜 사실을 고백하며 그들의 가정을 파탄 낸다.

 

여기까지 들으면 질투와 집착에 눈이 먼 웬 미친 여자인가 싶지만, 사실 그녀에게도 나름의 이유는 있다. 그것은 다른 영화들처럼 어떤 정의감이나 윤리의식, 그리고 분노 같은 평범하고 인간적인 감정들이 아니다. 그녀가 행동을 시작하는지의 여부는 상대가 나에게 도전했는가 아닌가에 달렸다. 그녀는 불안감이나 죄책감이 아닌 불편함과 귀찮음 때문에 관계를 그만두었으나, 불륜 상대였던 로버트가 그녀의 질투를 일으키고 도발하려는 듯한 행동을 하자 제재를 가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말하자면 친구를 불러내 그녀의 남편과의 불륜을 고백하는 행위는, 친구를 괴롭히기 위한 것도, 자신의 죄책감을 떨치기 위한 것도 아닌, 자신에게 도전하는 인물을 응징하는 행위에 가까웠던 것이다.

 

이는 강간범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자신이 성적으로 이끌리고 친밀함을 느꼈던 옆집 남자가 자신을 강간한 범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도 그녀는 그를 신고하지 않는다. 영화에서는 그녀의 심리(강간범의 정체를 알고도 신고하지 않는 것)에 대한 어떠한 답도 제시하지 않지만, 나는 그것이 그녀가 관계에서 느끼는 지배력과 연관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상대의 ‘진짜’ 정체를 알기 전까지 미셸은 옆집 남자를 유혹하고 리드하고 지배하는 쪽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현실 속 권력관계와 상관없이 위험한 게임(강간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섹스)을 계속 시도하자 미셸은 그에 위협을 느끼고 그를 죽게끔 만든다. 이는 그녀가 강간의 행위 그 자체보다도 자신을 위협하고 도전하고 권위를 빼앗아가는 행태를 더 문제시했음을 암시한다.

 

이런 그녀의 특성은 회사 직원이 자신을 성희롱하는 영상을 퍼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그녀는 직원을 해고하거나 경찰에 신고하거나 공공연히 모욕을 주는 대신 자신의 눈 앞에서 그의 바지를 벗긴다. 아니, 그 스스로 바지를 벗고 모욕을 당하도록 만든다. 이는 성적인 제재를 가함으로써 빼앗긴 지배력을 다시 되찾아 오는 것이다. 흔히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하는 것과 같이.

 

사실 한 명의 인간으로서의 미셸은 거의 사이코패스에 가까울 정도로 자기중심적이며, 상대를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욕구가 강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그런 그녀의 서사를 어느 정도 납득하고 이해하게 되는 면이 있다. 논리적으로는 아니더라도 그냥 심정적으로 이해해 버리는 것이다. 내가 영화를 보면서 혼란을 느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어.... 이해하면 안 되는데... 왜 이해하게 되지? 이건 모두 주연을 맡은 이자벨 위페르 덕분이다. 그녀는 복잡하고 이상하고 카리스마 있는 이 미셸이라는 여성을 놀랍도록 잘 보여주었다. 중간중간 아주 약하게 드러나는 감정적인 면모 (아들과의 위태로운 관계,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등등)를 살리면서.

 

이 영화의 모든 장면이 놀랍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은 마지막 장면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덤가에 홀로 서 있는 미셸을 친구가 찾아온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하고 놀라는 미셸에게 친구는 너의 고백으로 인하여 우리 가정이 파탄 났다는 이야기를 한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미셸이 망설이는 사이 친구는 말을 잇는다. 그 뒤로 하도 술 처먹고 매일 울기만 해서 남편을 쫓아냈다고. 혼자 살기 외로우니 너희 집에 좀 들어가서 같이 살아도 되겠느냐고. 그러면서 두 여성은 어깨를 나란히 한 뒤 아주 가깝고 친밀하게 붙어서 함께 걸어간다. 육식동물인 여성들에게 남성 따위는 너무 하찮은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배우의 탄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