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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Jun 02. 2019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영화 <풀잎들>


홍상수의 <풀잎들>을 보는 중이라고 하자 누군가 물었다. “볼까 말까 고민 중인데, 볼만한가요?” 잠깐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기존에 홍상수 영화를 좋아하면 재밌을 거고, 그렇지 않으면 별로일 거라고. 영화를 끝까지 본 지금,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도 여전히 저 대답이 최선인 것 같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홍상수만큼 색깔이 뚜렷한 감독도 드물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에게는 소위 말하는 ‘서사’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이를테면 주인공이 어떤 시련을 겪거나 갈등에 놓이거나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 말하자면 줄거리라고 할만한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장면은 늘 그게 그거다. 술 마시면서 이야기하거나, 술 마시다 말고 잠깐 밖에 나와서 담배 피우며 이야기하는 것.

그의 방식은 특정한 상황에 처한 인물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하려 애쓰는지를 보여주기보다는, 그 상황을 인물 스스로 어떻게 인식하는지, 그것을 타인에게 어떻게 표현하는지에 중점을 두는 쪽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한 상황이나 서사가 아닌 대화, 그것도 대사 한 줄 한 줄 보다는 전체적인 흐름, 즉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훨씬 더 중요한 요소로 자리한다. 그리고 <풀잎들>은 그의 이러한 경향이 전작들보다 훨씬 더 강화된 작품이다.

이 영화를 굳이 한 마디로 줄이자면 길이나 식당에서 남의 말 엿듣기 좋아하는, 친구도 없고 성격도 이상한 여자가 하루 종일 카페에 죽치고 앉아 손님들이 하는 이야기 훔쳐 듣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과장이 아니라 영화 속 배경이라고는 고작 3곳이 다이며(카페, 식당, 골목), 등장인물 또한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를 통틀어 스무 명이 채 안된다.

주인공(김민희)은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노트북을 펼쳐놓고 주변인들을 열심히 관찰한다. 친구 이야기를 하다가 큰 소리를 내며 다투는 젊은 커플(?)을 두고 죽었다는 친구의 사연을 짐작해보기도 하며, 젊은 여성에게 갈 곳이 없다고 하소연하는 중년 남성을 보면서는 그를 동정하는 동시에 경멸하기도 한다. 동생 커플을 만나러 나간 자리에서는 뒷자리에서 흐느끼는 여성과 그녀를 다그치는 남성의 대화를 듣고 생각하기도 한다. 산다는 것은 뭘까. 사랑이란 뭘까. 죽음은 뭘까.

재미있는 것은 그녀가 관찰하고 엿듣고 기록하면서도 결코 개입하려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언제나 청자이고 싶어 하지만 대화의 참여자가 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그렇게 엿듣지만 말고 이리 와서 같이 앉으라는 초대를 받고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죄송한데 저는 여기서 엿듣는 게 더 편해요.

이것은 사실 어떤 이야기를 대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듣고, 보고, 기록한다. 단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아마도 지켜보거나 엿듣는 것에는 판단은 들어갈 수 있어도 책임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한편으로는 거리감을 유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할 테고. 그녀는 술을 마시며 웃고 떠드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한다. 어떻게 저렇게 친하게들 구는 걸까? 불쾌하다, 정말.

실제로 관찰자가 아닌 참여자로 자리하던 거의 유일한 순간, 동생과의 만남에서 그녀는 예의 그 이상한 성격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처음 만난 동생의 여자 친구 앞에서 느닷없이 결혼 관련한 궤변을 늘어놓는 한편, 식당에서 계산을 마치고 나온 뒤에 흥분하여 마구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어쩌면 그녀가 청자나 관찰자로만 머물고 싶어 하는 까닭은 스스로의 세계에서 희노애락을 느끼고 행동하는 한 명의 인물대신 어떤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존재로 자리하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현실 속 인간들은 소설 속 등장인물과는 다르다. 놀랍게도, 한편으로는 당연하게도 그렇게 타인의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비웃고 공감하고 분노하던 그녀 앞에 관찰 대상이었던 이들이 하나하나 나타나기 시작한다. 뭘 그렇게 하루 종일 열심히 쓰세요? 정말 대단하세요. 저기 한참 동안 계셨죠? 거기서 뭐 하세요? 하는 식으로.

그러니까 하루 종일 뒤에 숨어서 남을 일방적으로 관찰하고 있다고, 벽 뒤에서 안전한 자리에 놓여 있다고 생각했던 그녀 역시도, 실은 자신이 관찰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대상들로부터 관찰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 자신은 관찰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그런데 어쩌면 이것이 창작의 본질 같기도 하다. 세상을 관찰하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그것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 그러나 실은 그러한 행위를 함으로써 자기 자신은 그 누구보다도 맹렬한 속도로 타인의 한 복판으로 뛰어들고 있다는 것. 그래서였을까. 줄곧 뒤에 머물며 앞으로 나서길 거부하던 그녀는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초청한 테이블의 한 자리 앞으로 나선다. 이제 관찰자가 아닌 참여자가 된 것이다.

하여간에 어딜 가기만 하면 남이 무슨 말을 하든지, 어떤 행동을 하는지 늘 훔쳐보고 엿듣는 나로서는 재미있는 한편 정말이지 오싹한 영화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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