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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Jul 29. 2019

애매한 해피엔딩보다는

<태풍이 지나가고>,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소설을 본격적으로 써보기로 마음먹고 소설 수업을 들으면서 깜짝 놀랐던 점이 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줄 미처 몰랐던 것이다. 처음에는 소설 수업에 다 나 같은 사람들만 있을 줄 알았다. 좀 예민하고, 소설을 열심히 읽고, 글쓰기를 좋아하고. 그런데 실제의 수강생은 60대 아저씨 아주머니들부터 아주 어린 학생에 이르기까지 너무다 다양했다. 성별도 비등비등했고, 어떤 ‘특징’이랄까가 전혀 없었다. 단 한 가지 공통점은 다들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마음을 꽤 오랫동안 품어왔다는 것 뿐이다. 딱히 글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지 않음에도.

 
소설 수업을 듣는다고 밝힌 이후부터 가끔 수업에 관해 묻는 메시지들이 오곤 한다. 질문을 하는 이들 역시 국문과 학생이나 평소 글쓰기에 열심인 이들이 아니라 ‘아니, 이분도 소설에 관심 있는 줄 미처 몰랐네?’ 싶을 정도로 의외인 사람들이 많다. 그러면서 나는 소설을 쓰는 게 꽤나 보편적인 욕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사람들 모두가 ‘소설가가 되기’를 꿈꾼다기보다는 ‘소설 쓰기’ 그 자체를 원하는 것에 가깝다. 물론 그렇게 쓴 소설이 남들에게 읽히고 유명해지고 돈도 벌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어쨌든 ‘소설가가 되기’와 ‘소설 쓰기’는 꽤나 다른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소설을 쓰고 싶어 할까? 그것은 결국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의 잊을 수 없는 순간, 은밀한 소망, 간절한 바람들을 어떤 식으로든 풀어나가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에. 그러나 우리의 언어는 너무나 제한적이고, 내가 겪었던 슬픔과 기쁨과 간절함은 “너무나 기뻤다” 혹은 “너무나 슬펐다”와 같은 말로는 전달 되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이야기로 바꿔서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풀어내고 싶은 것이라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경험하게 하고 싶은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실제로 수업을 듣고 사람들이 써오는 과제를 읽어보면, 모든 작품이 각자의 자아를 오롯이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소설 속 인물이 작가 가 아님은 너무나 명백하지만, 각각의 이야기에서 배어 나오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찌나 작가들 자신과 닮아있는지, 놀라울 지경이었다. 이루어질 수 없었던 소망, 삶에 대한 조크, 안타깝고 미안한 감정, 지나가버린 것에 대한 미련, 돌아올 수 없는 대상에 대한 그리움. 공간과, 시간과, 인물이 변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작품 밑바닥에 깔려있는 그 근원적인 ‘주제의식’ 자체는, 사람이 변하지 않는 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잘 살펴보면 기존에 활동 중인 유명한 작가들도 죄다 일관된 테마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겉으로는 조금씩 달라 보일지언정 근원적인 주제는 변하지 않는다. 작년부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못 봤던 작품을 찾아서 보고 있다. 많은 이들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가족의 해체’를 주로 다룬다고 이야기하고, 그 역시 맞는 얘기지만 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이야기들이 근원적으로는 ‘희망을 단호하게 꺾어버리면서  다정한 위로를 건네는’ 이야기들이아고 느꼈다.


일례로 <어떤 가족>의 경우 각각의 필요에 의해 ‘유사가족’의 형태를 꿈꿔보려고 하지만, 아무리 네가 부모처럼 하려고 해도 부모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고레에다 감독은 말한다. <아무도 모른다>에서 엄마에게 버려진 아이들은 각자 자기들 나름대로 살아보려고 갖은 방도를 다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무너져버린다. <세 번째 살인>에서는 선의가 섞였던 어떤 행동이 결국 모든 일을 망쳐버린다.


<태풍이 지나가고>에 와서는 이런 점이 훨씬 더 명백하게 그려진다. <태풍이 지나가고>는 실패한 예술가가 주인공이다. 젊은 시절 문학상을 수상한 주목받는 작가였던 료타는 이후 10년간 단 한 권의 책도 내지 못한 채 현재는 ‘탐정’이라는 이름 하에 흥신소에서 바람피우는 남녀를 몰래 촬영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중이다. 료타는 이혼한 아내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갖은 애를 써보지만 아내는 이런 료타에게 비바람이 몰아치는 놀이터에서 조용히 말한다. “이제 마음 정했으니까, 편히 갈 수 있게 해 줘. 알아들었어?” 료타는 대답한다. “알아들었어. 알고 있었어.” 사이가 좋았던 옛 시어머니의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하는 회한 섞인 눈물로도 아내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다. 그렇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말한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세상에는 그런 일들도 있어요. 이제 단념하고 받아들이세요.

태풍이 지나가고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역시 유사한 테마를 다룬다. 부모의 별거로 인해 어린 두 형제 코이치와 류노스케는 각자 엄마, 아빠를 따라 떨어지게 된다. 엄마를 따라 외가댁에서 지내는 코이치의 유일한 소원은 다시 네 가족이 모여 다 함께 사는 것이다. 코이치는 방 한켠에 화산 그림을 그려 붙여놓고 센다이에 있는 화산이 분화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화산이 분화하면 그 일대에 사는 모든 사람이 대피를 해야 할 것이고, 그러면 결국 엄마도 이곳을 떠나 아빠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코이치의 계산이다. 그러나 화산은 폭발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결국 코이치는 화산 폭발의 소원을 빌기 위해 기차를 탄다. 새로 개통된 신칸센의 열차가 서로 맞닿는 순간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아이들 사이에 돌았기 때문이다. 결국 코이치와 류노스케 형제는 각각 친구들을 데리고 신칸센이 보이는 지점에서 만나기로 한다.


이때 코이치 류노스케 형제가 데려가는 친구들 마음속에도 각자 간절히 원하는 바가 있다. 죽은 강아지가 살아나면 좋겠다든지, 노력하지 않고도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든지, 여배우가 되고 싶다든지. 여배우가 되고 싶은 소원을 가진 아이는 <태풍이 지나가고>의 료타처럼 애매하기 짝이 없는 재능을 지녔다. 예쁘지만 배우가 될 정도로 예쁘지는 않다. 노력하지 않고 그림을 잘 그리게 해 달라는 아이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지만 재능이 없어 보인다. 죽은 강아지를 살아나게 해 달라는 소원은 말 그대로 터무니없다. 이루어질 리 만무하거나, 이루어지기 대단히 어려운 소원들이다.



코이치의 소원 역시 마찬가지이다. 화산이 폭발 할리 없고, 폭발해봤자 가족은 아마 다시 다 같이 모여 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의 제목은 비록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이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단념하세요. 받아들이세요. 결과적으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중에는 해피엔딩이 하나도 없다. 원하는 바를 이룬 인물은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다.

 



재미있는 점은 그의 받아들여, 포기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아요, 하는 메시지가 매우 단호하면서도 따뜻하다는 데 있다. 어쩌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마치 초등학교 시절 한 번쯤 만나본 적 있는 엄격하지만 다정한 선생님 같은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울고 졸라봤자 안 되는 건 안돼. 하지만 너의 그런 괴로운 마음을 선생님은 이해한단다. 그 괴로운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리고 안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인생이 끝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의 영화에는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같이 기적을 이루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많은 사람들, 아픈 마음을 이해해보려고 하는 사람들. 그 마음들은 너무나 따뜻하고도 다정해서, 원하는 바가, 간절히 바라던 바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인생은 여전히 끝이 아니고 그럼에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어떤 영화는 슬픈 장면이 하나도 없음에도 너무 아름답고 선량해서 되려 눈물이 나는 경우가 있다. 설거지를 하면서 이 두 영화를 봤는데, 둘 다 보고 나서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사실 내가 소설로 쓰고 싶은 이야기들 역시 이와 비슷할지 모르겠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는 거. 하지만 인생에서는 결과가 정해지더라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이야기들이 있으니까. 언젠가는 그런 이야기들을 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니까 해피엔딩이 아니라고 해서 반드시 새드엔딩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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