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승혜 May 22. 2019

쉽게 만나는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악은 의외로 평범하다”는 지금은 꽤 널리 알려진 말이다. 엄청난 괴물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악을 저지른다는 이야기. 이 말은 한나 아렌트의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나오는데, 그녀는 이 책을 통해 세계적인 학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유명한 그녀의 저서들을 직접 읽어본 사람은 그 명성에 비해 의외로 적은 편이다. 아마도 철학사상서적은 어려울 것이라는 선입견과 두려움 때문인지. 참고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국내판은 번역까지 썩 좋지 않다고 한다.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은 그렇게 늘 궁금하면서도 선뜻 다가서기 어려웠던 한나 아렌트를 그녀의 삶에 일어났던 3번의 중요한 탈출을 중심으로 하여 그래픽 노블로 풀어낸 책이다. 첫 번째 탈출은 독일에서 유대인 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무렵으로, 그녀는 자신을 취조하던 독일인 장교의 마음을 사로잡아 극적으로 탈출한다. 두 번째 탈출은 프랑스가 독일에 함락당하던 시기로, 그녀는 역시 다시 한번 기지를 발휘하여 유대인 수용소를 탈출하고 경찰의 추격을 보기 좋게 따돌린다. 그리고 그렇게 마침내 자유의 국가 미국에 도착한 그녀는 마지막 세 번째 탈출을 하게 된다.
 
참고로 이 세 번째 탈출은 앞의 두 번과 사뭇 성격이 다르다. 다른 두 번이 문자 그대로의 탈출이었다면, 마지막은 자신의 민족으로부터의 정서적 탈출이라고 할 수 있다. 뉴욕에 거주하며 학자로서 명성을 쌓아가던 그녀는 우연히 나치 전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관람할 기회를 얻게 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쓴 <예수살렘의 아이히만>이란 글로 인해 유대인 사회에서 어마어마한 비난을 받게 된다. 대중은 그녀가 그토록 끔찍하고 참혹한 범죄를 저지른 ‘괴물’을 남들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한 것에 몹시 분노했던 것이다. 심지어 그녀를 몹시 아끼고 높이 평가하던 지도교수조차 등을 돌렸을 정도였다.
 
어떻게 그런 악인을 변호하고 민족을 배반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이야기한다. 아이히만을 사악한 괴물이라고 한다면 어떤 면에서 그의 범죄를 용서해주는 거라고. 그리고 우리 모두 잠재적인 죄를 짓게 되는 것이라고. 또한 그녀는 당신은 우리 민족을 사랑하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하기도 한다. 사랑은 사적인 거예요. 난 유대 민족을 사랑할 수 없어요.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건 가족과 친구들 정도죠. 그런 열정을 공적 영역으로 가지고 나가면 오히려 더 많은 아이히만이 탄생하게 돼요. 즉 그녀는 개인이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의 중요성, 그리고 집단과 군중으로부터 발휘되는 어떤 힘이 악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누구보다도 일찌감치 깨우쳤던 것이다.
 
그녀의 이와 같은 의견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많은 사람들이 머리로는 “악은 평범하다”는 말을 받아들이면서도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성폭력 사건에서, 학교폭력 사건에서, 아동학대 사건에서, 혹은 더욱 흉악하고 끔찍한 범죄들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대중은 범인이 정신이상자나 괴물과 같은 모습을 한 흉악한 사람이기를 기대한다. 그러면서 범인의 모습이 기대와 다를 경우에는 범죄 자체를 부정하기도 한다. 평범한 사람이 평범하게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정작 그런 사건 앞에서는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은 이처럼 쉽게 접하기 어려웠던 한나 아렌트의 생과 사상을 만화로 소개하고 있어 상당히 편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한나 아렌트와 동시대를 살았던 유명한 지식인들(벤야민, 하이데거, 고다르 등등)이 엄청나게 많이 등장하는데, 지식이 짧아 그들 개개인의 사상과 철학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 아쉬웠다. 철학이나 영화사 등에 박식한 사람들에게는 아마 훨씬 더 흥미롭게 다가올 듯하다.

한나 아렌트의 특출 난 지성, 의사가 담배 좀 줄이라는 충고에 하루에 2갑까지는 줄여볼 수 있겠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골초였던 그녀의 습벽, 그녀의 연애사 등등 재미있는 대목이 많았지만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그녀가 유대인으로서의 자신을 대하는 모습이었다. 이전에 필립 로스의 자서전을 읽으며, 그가 자신의 혈통을 자랑스러워하는 동시에 버리고 싶은 족쇄처럼 대하는 듯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심지어 꽤나 여성 편력이 있었던 필립 로스는, (꽤 오래전 읽은지라 정확히는 기억 안 나지만) 그 많은 여성 중 유대인은 단 한 차례도 만난 적이 없었을 정도였다. 유대인 여성에게는 아예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이번에 한나 아렌트에게서도 같은 것을 느꼈다. 이를테면 그녀는 “유대인이라고 공격받으면 유대인이라는 사실로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늘 가슴에 새기고 유대인으로서의 자신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며 살았지만, 동시에 거의 매 순간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기도 했다. 그녀는 매번 자신은 여성도 아니고 유대인도 아니고 자기 자신이라고 이야기했다. 심지어 필립 로스와 마찬가지로 한나 아렌트의 경우에도 진정으로 사랑했던 남자 두 명은 모두 비유대인(독일인)이었다. 두 번째 남편과 사랑에 빠지던 순간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이 남자는 완벽해! 책 한 권을 다 읽는 법이 없고 머리가 좋고 유대인이 아니고 게다가 엄마가 싫어하는 남자잖아.”
 
그러나 이와 같이 어떤 정체성을 자랑스러워하는 동시에 감추고 싶어 하는 모습은 약자 집단에서는 꽤나 흔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란 생각이 든다. 여성, 유색인, 장애인, 성소수자, 등등 모든 약자에게 마찬가지인데, 이는 그들에게는 그 ‘약자’로서의 특성이 어느 순간 라벨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백인 남성 OO의 경우에는 백인 남성 OO이라고 불리는 일이 없지만 흑인 여성 OO의 경우, 무엇을 하든, 심지어 업적을 쌓고 명성이 높아지더라도 흑인 여성 OO라고 불린다. 약자의 경우 어떤 행동이든 곧 집단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버리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녀의 훌륭한 글과 생각은 어쩌면 그와 같은 복잡한 정체성 안에서 태어났다는 생각도 든다. 그녀라면 썩 달가워하지 않을 말인지도 모르겠지만.


⭐️⭐️⭐️



매거진의 이전글 슬픈 농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