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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May 19. 2019

슬픈 농담

<당신의 노후>

<나,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영화에서는 주인공인 다니엘 블레이크가 복지기관과 통화하기 위해 무려 2시간 30분 동안 기다리는 장면이 나온다. 마침 <당신의 노후>라는 소설을 읽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그 장면을 보면서 생각했다. 아, 작가가 분명 이걸 봤겠구나. 여기서 영감을 얻었을 수도 있겠구나.
 
박형서의 소설 <당신의 노후>는 그리 멀지 않은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상상의 세계를 바탕으로 한다. 지금으로부터 14년 뒤의 대한민국은 초고령사회가 되어 있다. 청년 3명이 노인 7명을 부양하는 사회. 노인들의 무임승차를 벌충하기 위해 젊은이들의 지하철 요금은 밥 한 끼 값을 넘는 사회. 청년들이 100만 원씩을 벌면 노인을 부양하기 위해 전부 세금으로 뜯기고 손에는 50만 원이 겨우 남는 사회. 청년들은 빈곤하고 노인은 각종 연금을 몇백만 원씩 수령하는 사회. 그곳에서 노인은 신체적으로는 약자이지만 경제적, 정치적으로는 기득권자이다.
 
그러하다 보니 사회 전반적으로 노인을 혐오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있다. 몇 안 되는 젊은이들은 노인을 보면 침을 뱉고, 욕설을 한다. 물론 워낙 숫자가 저조한 탓에 별 영향력이 없지만. 여기까지 읽고 박형서답지 않게 꽤나 현실성이 있는 상상인데?라는 생각이 들 법하지만 당연히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소설 속에서 국가기관인 연금관리공단의 공식적 업무는 연금을 관리하는 것이나, 비공식적이고 실질적인 임무는 지나치게 오래 살아있는 노인들을 암살하는 것이다. 공단은 전문 킬러인 직원들을 보내서   노인들을 사고사로 위장하여 살해한다. 간혹 신문 부고란에 등장하는 노인들의 사고사는 대부분 이들의 소행이다. 오랜 세월 이들의 일원으로 활약하다 퇴직 후 아내를 보살피며 살던 주인공 장길도는 어느 날 아내 역시 ‘명단’에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엄청난 번민과 고뇌에 빠진다.
 
평소 박형서 작가를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 극단적인(?) 상상력으로 인해 아주 선호하거나 좋아하지도 않는 편이었다. 계속 읽다 보면 좀 머리가 아파진달까. 그냥 아무 말 대잔치 같은 경우도 많고. 그런데 이 소설은 상당히 재미있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극단성은 조금 줄어든데 반해 특유의 유머와 위트는 여전히 살아 있다. 이를테면 연금관리공단과 통화하려면 통상 대기시간이 20시간이지만 그럴 때 비장하게 직통 방법인 18181818181818을 연속으로 누르면 연결된다든지 등등.
 
판타지와 상상에 불과한 이야기지만, 한편으로는 다가올 미래를 상당히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소설이었다. 박형서 특유의 농담으로 덮여 있어 잘 드러나진 않지만, 실은 굉장히 슬픈 이야기였다고도 생각한다.


⭐️⭐️⭐️ 어렸을 때 노인을 보면 그저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청년 시절에는 노화에 대해 철학적으로 접근해보았고, 조금 더 나이가 들어서는 기력이 쇠한 노인들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이제 장길도는 자신에게도 다가온 그 늙음이 마냥 두렵고 두렵다. -p.66 죽은 노인은 착한 노인이다. 자살한 노인은 우리 사회의 동지다. -p.76 연금이 저축해둔 돈 찾는 게 아닌 거 알잖아. 생산인구 소득을 거둬 비생산인구들에게 나눠주는 거야. 요새 청년 세 명이 노인 일곱 명을 부양하고 있어. 청년들이 100만 원씩을 벌면 너희 늙은이들한테 쪽쪽 빨려서 집에는 대략 50만 원씩만 가져간단 말이야. 그 돈으로 애인 만나 찻집에 가고 결혼을 하고 애도 낳아 기르고 월세도 내야 돼.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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