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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May 28. 2019

신대륙으로서의 화성

<화성 연대기>

소설도 많이 읽고 영화도 많이 보지만 그중 SF 관련한 것은 거의 없다. 왜 그렇게 관심이 안 가는 것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결국은 실현 가능성이 없어서, 너무 허구의 이야기라 와 닿지가 않아서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SF 뿐만이 아니라 픽션의 세계가 근본적으로 모두 허구인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아무튼간에 우주선을 타고 어디 날아가서 외계인과 우정을 쌓고 반지를 만들어서 지구의 절반을 날려버리는 이야기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이야기 아닌가. 아마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어벤저스 엔드게임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일은 어렵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 와중에도 간혹 재미있게 보는 SF물들이 있긴 하다. 유명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품들은 대체로 다 재미있게 봤다. 아주 아주 열광적으로 몰입해서 좋아하는 수준까지 가질 않아서 그렇지만.
 
이전에 어슐러 르 귄의 소설 몇 편을 읽고 이런 SF도 있구나, 하며 놀랐던 적이 있는데 이번에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 <화성 연대기>를 읽고도 상당히 놀랐다. 르 귄과는 다른 의미로 이런 SF도 가능하구나 싶은 생각을 하며 감탄했다. <화성 연대기>는 SF물이지만 한편 일반적인 SF물과는 사뭇 다르다. 이것은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한다거나, 외계인과 지구인 사이의 어떤 특별한 우정이라거나, 우주선을 타고 여행한다거나 하는 흔한(?) 스토리가 아니라, 한마디로 화성을 침략하고 정복하는 지구인들에 대한 이야기다.
 
즉 이 곳에서의 화성은 우주가 아니라 또 하나의 ‘대륙’인 것이다. 화성에 도착한 뒤 인간들이 하는 행태는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뒤 그곳을 정복하고, 그 안에서 경쟁과 다툼을 반복하다 결국 그곳을 파괴하고, 또 다른 대륙을 찾아 떠나는 기존의 모습과 어떠한 차이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SF소설이지만 동시에 인간들의 세태에 대한 우화소설이자 풍자소설이기도 하다. ‘연대기’란 제목처럼 하나의 긴 이야기가 아닌 짧은 연작 소설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정한 주인공이나 인물이 정해져 있지 않고 다양한 인간군상이 행하는 다양한 사건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의 그러한 모습은 그냥 인류의 모습 그 자체다. 아름다운 문장으로 만들어진, 기껏해야 2~3페이지에 불과한 짧은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심리와 사고를 상당히 잘 드러내 준다.
 
모든 이야기가 다 훌륭했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편 중의 하나는 화성으로 이주하려는 흑인들을 대하는 백인들의 태도였다. 그들은 왜 상황이 점점 나아지고 있는데, 이만하면 충분히 살만한 상태가 된 것일 텐데, 지금 굳이 떠나려 하는지 모르겠다며 의아해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흑인들이 없어지면 기존에 그들이 하던 일을 누가 할 것이냐고 분노하기도 하고 당신들이 직접 하면 되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너 지금 진심으로 백인이 네 자리를 대신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니?”라고 묻기도 한다. 1940년대에 쓰인 소설이 8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까지 여전히 유효한 것을 보면서 훌륭한 소설은 시대를 초월한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이 소설을 읽고 레이 브래드버리의 다른 소설들도 모두 주문했음. ㅎㅎㅎ


⭐️⭐️⭐️⭐️


그들은 낯선 파란 땅으로 와서 그 땅에 자기들의 이름을 붙였다.
‘힝크스턴 골짜기’, ‘러스티그 거리’, ‘블랙 강’, ‘드리스쿨 숲’, ‘페러그린 산’, ‘와일더 시’처럼 사람의 이름이나 그들과 관계된 일의 이름이 붙여졌다. 화성인들이 최초의 지구인을 살해한 장소는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 거리’가 되었다. 2차 탐험대가 몰살된 곳에는 ‘재시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탐험대원들이 불을 뿜는 가마솥을 착륙시켜 땅을 불태운 곳은 어느 곳에나 불타고 남은 재 같은 이름들이 남겨졌다. 물론 ‘스펜더 언덕’과 ‘너새니얼 요크 마을’도 있었다.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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