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이해>
이혁진의 <사랑의 이해>. <누운 배>로 한겨레 문학상을 수상한 이혁진 작가가 두 번째로 쓴 소설이다. 신간 안내코너에서 보고 어라 새로 나왔네 하고 반가워하긴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대놓고 ‘연애소설’을 표방하길래 별 기대는 없었다. 사람들 사랑하고 사귀는 이야기가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고, 더군다나 남성작가가 쓰는 연애소설이라면 찌질한 남성 캐릭터들에 대한 각종 연민으로 가득차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여자들이 쓰는 사랑이야기가 뭔가 징징대고 땅파고 굴파는 느낌을 연상시키는 면(요즘은 아니다. 한 10년 전의 이야기)이 있다면, 남자들이 쓰는 사랑이야기는 불필요하게 진중하거나 혹은 되도 않는 자기 연민과 과시로 가득차서 마치 ‘뇌’가 발정난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많아서 말이다. 게다가 한 직장, 더군다나 뭐 특별히 관심가거나 흥미로운 것도 아닌 은행이라는 장소에서 근무하는 4명의 남녀가 주인공이라는데 뭐 그렇게 대수로운 이야기가 나올까 싶은 생각도 있었고. 그러나 막상 집어들어 읽기 시작하니 멈출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었고, 그 이상으로 아주 훌륭한 소설이었다.
훌륭한 소설의 핵심은 결국 독자로 하여금 납득을 하게 만들 수 있느냐의 여부라고 생각한다. 인물의 서사, 그가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 그러한 생각에 도다르기까지의 심리, 어떠한 행동과 결정을 하기까지의 과정을 이해시키는 것. <사랑의 이해>에서는 등장인물 그 누구하나 남성도, 여성도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역할로 머물지 않는다. 마음도 없으면서 유혹을 하는 사람, 그걸 알면서도 유혹을 당하는 사람, 이러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바람을 피는 사람, 뭐 하나 부족한 게 없는 상황임에도 알 수 없는 불안과 불만을 느끼는 사람.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다. 작가는 인물들에 대한 연민의 시선을 유지하는 한편으로는 끝까지 냉소와 직시를 잃지 않기도 한다. 남성작가가 이렇게 쓰는 것이 가능한가 하고 놀라게 될 정도로 평범한 남성들의 저열하고 찌질한 민낯을 리얼하게 그려내기도 했다. 사랑의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관계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의 계급성을 선명히 보여준 부분이 아주 좋았다.
그리고 소설의 주된 내용은 아니지만 찌질한 남자들의 모습이 상당히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그걸 보는 재미도 있었다. 내가 신입사원이던 시절에, 회식이 끝나고 괜찮다는 나를 끝끝내 집까지 데려다준다고 고집을 부리던 어떤 남자는 남자친구가 있다는 내 말에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나요?”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응, 골키퍼 있어도 골 들어갈 수 있지. 근데 그건 선수일 때의 이야기고, 관객이 그러면 경찰에 끌려가지, 라고 생각했지만 당연히 말은 못했고.
하여간 그 남자는 몇 년 후에 내 SNS를 스토킹해서 잘 보이지도 않는 아주 희미한 사진을 가져다가 사람들 사이에 뿌리고선 이게 한승혜 남친이다 어쩐다 소문을 냈다. 당시에 그걸 알고선 온갖 쌍욕을 다 퍼부어주고 싶을 만큼 화가 났었고, 그 이상으로 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 가서 답답했는데, 10년 정도 지나고 나니 이제는 희미하게 알 것도 같은 마음이 든다. 책을 읽다보니 희한하게도 그 때 생각이 났다. 물론 언제나 그렇지만 ‘이해’한다는 것이 동의, 혹은 용서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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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같은 말이야. 나 같은 놈한테 무슨 선택이 있어? 고작 한두 번 객기나 부리는 거야. 그래, 나도 고시 한 번 쳐 봤지. (...) 내려오는 동아줄은 하나야. 나보다 못난 놈, 잘난 놈 수백 수천이 그 동아줄 하나 붙잡아 보자고 이러고 있는 거고. 그런데 차이가 뭔지 알아? 못나고 잘난 게 아니야. 바닥이야. 디디고 선 바닥!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나처럼 유리 한 장이 바닥인 놈은 못 뛰어. 더 높게 뛸수록 와장창 박살이 나니까. 굴러떨어지면 어디로 굴러떨어질지 환히 보여서. 서 있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니까. 콘크리트 바닥인 애들은 달라. 걔네들한테는 뛰든 말든 하고 싶고 말고의 문제야. 뛰고 뛰다가 다 싫어지면 관두고 딴 거 해도 돼. 우리 엄마 같은 사람 자르고 자기네 건물 청소나 해도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어. 차라리 부러워나 하지.” 종현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난 뭐가 될까? 이것도 못 되는 난 도대체 뭐가 될 수 있을까!” -p.234-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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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안 그런 남자가 어디 있어? 넌 절대로 그럴 여자였고? 똑같아, 그 문제에 있어서는 남자나 여자나 다 빈민처럼 똑같아. 기회, 외모, 돈, 능력, 시간 그 차이지 다른 거 없어. 우리 다 거지 새끼들이야. -p.321-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