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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Jul 10. 2019

놀이공원에서

나는 겁이 매우 많다. 이 겁이 많다는 말은 매우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는데, 어떤 상황에서든지 되도록이면 위험을 회피하고 (신체적, 정신적) 안전을 도모한다는 뜻이다. 새롭고 모험적인 시도는 잘 하지 않는다. 음식점에서는 대개 늘 먹는 메뉴를 고른다. 운동도 익스트림 스포츠보다는 주로 안전하게 혼자 할 수 있는 것을 좋아한다. 수영, 달리기, 스트레칭 등. 나이가 들면서 아주 미미한 변화가 생기고는 있지만, 여튼 기본 성향은 그렇다.

이런 사람이라면 당연히 놀이공원이나 무서운 놀이기구를 극혐하는게 수순일 텐데, 놀랍게도 아주 좋아한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당연히 아니고, 본래는 타고난 쫄보답게 신밧드의 모험 따위를 타면서 엉엉 울고 바이킹 중간에 직원이 기계를 멈추게 만드는 타입의 인간이었다. 그랬던 사람이 몇 년 사이, 아니 실은 하루아침에 놀이기구 마니아로 바뀌게 된 데에는 다 사연이 있다.

중학교 때 친구랑 놀이공원에 가기로 약속을 했는데, 당일날 아침 같이 가기로 했던 아이가 갑자기 일이 생겨 못 가겠다는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이었다. 부모님께 미리 용돈도 받아놓고 공부를 빠질 허락까지 다 구해놓았는데!!! 그 상황에서 약속이 취소되었다고 하면 왠지 다시 공부를 해야 할 것 같았고, 결국 눈물을 머금고 그렇게  홀로 놀이공원으로 향하게 되었던 것. 지금 돌이켜보면 그냥 도서관이나 영화관에 가면 됐을 텐데 너무 순진했다고 해야 할지.

그날은 하필이면 또 평일이었고 사람이 매우 없었다. 친구들과 함께였다면 정말 좋았을 그 한가함이 홀로 있을 때는 아주 큰 문제가 되었다. 혼자 가만히 있자니 시간이 너무 더디게 가고, 결국은 시간을 때우기 위해 유원지 안을 쉬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모든 기구를 골고루 탈 수밖에 없었고, 그런 과정을 몇 번씩 반복하는 사이, 비록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우연찮게도 무서운 기구를 안 무섭게 타는 방법을 깨우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방법은 다름 아닌 비명을 지르지 않는 것이었다. 본디 비명이란 누가 들어줄 사람이 있을 때 나오는 법.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그렇게 되어 버린다. 바퀴벌레를 혐오하는 나는 바퀴벌레를 보면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는데,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도 모르게’ 였다고는 해도 모두 주변에 누군가 있을 때였다. 혼자서 바퀴벌레를 본 경우에는 으아아아악 하는 비명 대신 헉 xx, 하는 탄식이 나오는 것을 문득 인지하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는데, 비명이란 그런 것이다.

하여간에, 혼자서, 그것도 사람도 별로 없는 놀이기구를 타면서 들어줄 사람도 없는데 비명을 지르자니 좀 부끄럽기도 하고, 기분도 안 나고 해서 입을 다물고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전혀 무섭지가 않은 것이다. 몸이 부웅 뜨면서 배가 간질간질할 때마다, 저것은 석촌 호수..... 뒤에는 산.... 나는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와 같이 명상을 하며 도 닦는 심경으로 가만히 있었더니 아무렇지 않았고, 그 순간을 경험한 뒤에는 정말이지 무슨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놀이기구를 엄청나게 잘 타는 사람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애초에 그렇게까지 하면서 놀이기구를 타야만 하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은 하여간.

나중에는 그런 식으로 소리를 지르지 않는 것에 대해 묘한 자부심까지 생겨서 아주 희한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후룸라이드나 롤러코스터와 같은 익스트림 어트랙션의 경우 사람들이 가장 공포심을 느끼는 위치에 카메라가 있고 출구 쪽에서 그 추한 표정이 찍힌 사진을 기념이랍시고 판매하는데, 대학생 때 친구들과 그 사진 속에서 누가 더 태연하게 찍혔는가를 두고 내기를 했던 적이 있다. 누군가는 자는 척하기도 했고, 그냥 평화로운 미소로 승부하기도 하고, 아예 무표정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친구도 있었다. 물론 그날의 승자는 나였다. 나는 그때 놀이기구를 타다 말고 가방에 있던 책을 꺼내 읽었다. 다시 한번, 애초에 그딴 짓거리를 왜 하는 것이냐란 의문을 가질 분들이 많겠습니다만 하여간.

지난 주말 오랜만에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다녀왔다. 어디 멀리는 아니고 에버랜드와 캐러비안 베이를 아예 숙소까지 잡아서 2박 3일 일정으로 다녀왔다. 엄청 힘들었지만 아이들이 좋아해서 나름의 보람은 있었다. 예전에는 거들떠도 보지 않던 어린이용 놀이기구밖에 탈 수 없었지만, 애들이 잠들었을 때는 나름 남편과 번갈아서 놀이기구를 한 두 개씩 타고 오기도 했다. 평일이라 사람이 없었던 덕분에 그간 익히 명성을 들었던 T-익스프레스를 탈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대기시간이 어마어마해서 차마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탑승하기 전 잠깐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타고 있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무시무시했다. 내 앞에 있던 연인은 긴장한 듯 손을 꼭 잡았다. 그들을 바라보며 나는 오늘도 소리 내지 말고 조용히 우아하게 타야지 조용히 다짐했다. 놀이기구가 출발하자 열차 여기저기에서는 “악 시발 나 미쳤나 봐.” 하는 욕이 들려왔다. 조금 뒤에는 그런 욕설도 사라지고 아예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비명뿐이었다.

정말 엄청나게 무서웠다. 무섭다고는 들었지만 정말로 무서웠다. 그럼에도 나는 처음의 결심대로 입을 꼭 다물고 소리를 내지 않았다. 나오는 길에 포토존에 들렸더니 무서운데 소리 안 내려고 억지로 참느라 이상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어떤 여자의 사진이 찍혀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놀이기구 탈 때보다 거기 찍힌 내 얼굴이 더 무서웠다. 무섭기도 하고 뭐랄까.... 남들은 아무도 신경도 쓰지 않고 전혀 중요하지도 않은 요소에 홀로 집착하다가 생겨난 결과물을 바라보는 느낌. 생각해보니 내 인생 대부분이 이런 것 같기도 하다. 앞으로는 놀이 기구 탈 때 그냥 소리 지르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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