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이야기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승혜 Jul 17. 2019

견디는 것도 재능

몇 주째 거의 원고를 쓰지 못했다. 지지난주에 아이들 데리고 여행 갔다 온 뒤부터니까 한 2주가량 계속. 물론 그간의 경험으로 자리에 앉아 무언가를 계속 끼적거리면 어쨌든 써지긴 써진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 그러므로 이리저리 시도를 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나온 결과물이 너무나 한심했다. 어쩌자고 책까지 내겠다는 결심을 한 것인지, 이렇게 재미없고 엉망진창인 글을 과연 누가 읽어줄 것인지, 스스로의 글을 보며 계속 놀라는 나날이었다. 결국 의기소침해져서 남의 글을 읽는 것으로 도피하고, 그러면서 세상에는 참으로 천재도 많고 잘난 사람도 많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또다시 놀라고. 이렇게 좋은 책이 많은데 굳이 나 같은 사람이 뭐하러... 하고 우울해지는 악순환.

못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나는 어릴 적부터 못하는 것을 유난히 못 견디는 아이였다. 잘 못할 것 같은 것은 아예 시도하질 않았다. 피아노가 좋아서 몇 년간 열심히 쳤으나 대회에 나가기 위해 본격적인 준비를 하다가 스스로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결국 얼마 안가 그만둬 버렸다. 노래를 못하는 것을 안 뒤부터 부르지 않게 되었다. 그림을 잘 못 그리는 것을 알고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되었다. 수영을 곧잘 했지만 아주 우수해질 만큼의 신체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취미 수준으로만 유지했다. 공부를 열심히 한 것은 열심히 하면 적어도 한 만큼의 성과는 나오기 때문이었다. 나름 노력의 가성비를 따지고 있었던 것이다. 잘했기 때문에 열심히 했는지 열심히 했기 때문에 잘했는지 지금에 와서는 모든 것이 애매하지만.

그런데 요즘 들어선 그 미미한 재능조차 조금씩 의심스러워져서 문제다. “아버지에게 분명히 있기는 했던 조금의 재능은 단지 좌절의 원천으로만 작용하며, 실현되지 않은 막연한 잠재력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줄 뿐이었다.” 앤드루 포터의 코요테라는 소설에 나오는 문장인데, 이 것을 읽은 뒤부터 매일같이 생각했다. 나에게 정말 재능이 있을까에 대하여. 물론 누군가는 내가 쓴 글을 읽어주고 좋은 말도 해주고 어쨌든 글을 써서 돈도 받은 적이 있으니 아주 쌩판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 아주 아주 미약한 재능이, 결국 기쁨이 아닌 좌절의 원천으로만 작용할까 봐 사실은 계속 두려웠다. 나는 가성비를 따지는 사람이니까.

그래서였을까. 누가 봐도 확연히 재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항상 이해가 가질 않았다. 너는 대체 뭘 믿고 그걸 하겠다는 거야? 넌 누가 봐도 재능이 없는데 그걸 하겠다고? 잘 안돼서 괴롭다고? 당연하지. 넌 재능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괴로워하지 말고 얼른 때려치워! 나처럼. 나 봐. 재능이 없는 것 같으면 얼른 그만둬 버리잖아. 근데 너는 뭘 믿고 계속하겠다는 거야? 가능성도 없는데 왜?

가끔씩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을 넘어서 아주 거슬리고 밉기까지 했다. 나에게 딱히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닌 사람들이 왜 이렇게나 미운 걸까 고민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실은 그들을 질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좌절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노력의 가성비 따위 연연하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어쨌든 묵묵하게 계속해나가는 모습을. 나는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일까 봐 늘 전전긍긍하며 살았기 때문에,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을 질투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제 당일치기로 서울까지 좋아하는 작가의 북토크에 다녀왔다. 물론 많이 좋아하는 작가이지만 사실은 여러 사람에게 신세를 져 가며, 돈과 시간과 몸을 축내가며 그렇게 다녀갈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갔다 오고 말았다. 왜였을까? 잘 모르겠다. 글도 써지지 않고, 그냥 기분 전환이 필요했는지도. 혹은 남들에게 자랑할 거리가 필요했던 것인지도(이런 거 부러워하는 사람 거의 없다는 게 함정). 일종의 도피, 혹은 해답을 얻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고.

그 역시 공모전에 50번도 넘게 떨어졌었다고 한다. 글을 쓰는 것은 즐겁지만 동시에 항상 힘들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냥 썼다고 한다. 성공할 만큼의 재능이 있다는 자기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깨달았다. 사실은 글쓰기를 비롯한 모든 것이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아니 재능이 아예 문제가 아닌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모든 사람이 견디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제와 생각해보니, 뚜렷하게 보이는 재능이 없는데도 무엇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일수록 더 대단한 것 같다. 그만큼 계속 견디고 있었다는 뜻이니까. 자기 확신이 있든 없든, 스스로의 초라함과 미약함과 덜떨어짐을 끊임없이 직면하면서, 도처에 널린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들 사이에서 찌질하고 못나고 보잘것없는 자신을 어떻게든 받아들이면서 그걸 견디고 있다는 이야기니까.

몇 주전에 꿈을 꾸었었다. 본래 점을 보거나 미신 따위를 믿지 않는데 꿈속에서 어떤 사람에게 타로점이었나 점성술이었나 이상한 점을 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복채랍시고 6천 원인가를 지불하고 내가 던진 질문은, 내가 과연 좋은 책을 쓸 수 있을까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요,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점쟁이의 대답은 이거였다. ‘당신은 자신이 소질이 없다고 느껴지는 일에 대하여 포기를 잘하는 사람입니까’

그 꿈을 꾼 다음날 하루 종일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암묵적으로 글쓰기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길게는 그만두라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너 소질 없다고 하면 그만둘 수 있어?라는 말로 다가왔다. 그렇다면 그만둬야 하니까. 나는 늘 가성비를 따지는 사람이었으니까. 소질이 없는 일은 계속 포기를 하면서 살아왔으니까. 오늘 그 꿈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다가 문득, 소질이 있고 없고의 영역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야기는 결국 소질과 관계없이, 내가 얼마큼의 재능을 지녔는가에 상관없이, 결국은 하고 싶은가 아닌가에 대한 것이었다. 포기를 할 것인가 아닌가. 견딜 것인가 말 것인가. 내 꿈을 내가 해석하고 있는 것도 우습지만.

아무튼 언제 또 어떻게 될지 몰라도 일단 오늘은 다시금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초라해도, 하찮아도, 보잘것없어도, 아무튼 그렇게 부딪혀가면서 계속하는 것으로. 나의 미미한 재능이 비록 좌절의 원천이 될지라도 어쨌든 그것조차 받아들이기로. 나보다 더 뛰어나고 훌륭하고 잘난 사람들은 조금만 미워하고 그 이상으로 사랑하면서 일단 잘 견뎌보기로.

매거진의 이전글 놀이공원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