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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Oct 01. 2019

여성적인 것, 남성적인 것

<밤의 언어>

얼마 전 소설 수업 시간에는 정용준 작가의 작품을 읽었다. 다 읽고 돌아가면서 합평이랄까, 소감을 말하고 있는데, 그중에 한 수강생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역시, 남성작가의 작품이라 그런지 뭔가 굵직굵직하고, 이야기도 힘이 있고, 그래서 마음에 들어요. 여성작가들하고 다르게. 여성작가들은 너무 소심하다고 해야 하나, 작은 이야기만 다루고 그러잖아요. 전 여성작가보다는 남성작가가 잘 맞는 것 같아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내 얼굴은 트럼프를 바라보는 툰베리처럼 구겨졌는데, 아마 맨 뒷자리에 앉아서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네가 지금 말한 것은 개소리야!라는 것을 정말 정말 표현하고 싶었건만... 안타까울 따름.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아니 저 말이 왜요? 하고 의문을 품을 사람도 있겠으나, 일단은 수강생 대부분이 여성이고, 말하는 본인도 여성이고, 강사도 여성인 상황에서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실례인 동시에 아이러니하다고 느꼈다. 물론 의견 자체도 동의할 수 없었고.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태도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말하곤 한다. 여성작가는 어쩌고 저쩌고, 남성작가는 어쩌고 저쩌고. 여성작가들은 너무 섬세해, 예민해, 징징거려, 소심해, 내면세계에만 집중해, 개인적이고 작은 문제만을 다뤄, 사랑타령만 해, 기타 등등. 그러면서 여성들도 남성들처럼 넓고 다양한 작품을 다루었으면 좋겠다는 건설적인 조언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듣다 보면 궁금해진다. 실제로 여성작가들이 저런가? 저것이 여성작가의 특징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대프니 듀 모리에나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를 보고 여성적이라 말하는 사람은 없다. 정유정을 보고 징징댄다거나 소심하다고 말하는 사람 역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작가들은 ‘여성’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여성작가의 작품 중에도 스테레오 타입에 부합하는, 섬세하고, 내밀한 세계를 다루는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들이 공존함에도 불구하고, 전자의 경우 여성적이라는 딱지가 붙고 후자의 경우 그렇지 않은 것이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모든 공포소설의 원형으로 꼽을 수 있을만한 작품인데, 프랑켄슈타인을 읽고 너무너무 여성스러운 소설!이라고 말하는 사람 또한 없다. 이를 두고 메리 셸리에 대해 “역시 여성작가라서 위대해!”라고 성별을 붙이는 사람은 없다. 위대한 작품을 쓴 여성작가들은 작품 앞에서 성별이 소거된다.
 
어째서일까? 이는 아마도 인간의 기본 모델이 ‘남성’으로 설정되어 있는 동시에, 남성이 가진 요소는 긍정적인 면으로 치부되고, 여성이 가진 요소는 부정적인 것으로 부각되는 경우가 많은 것과 일정 부분 연관이 있을 것이다. 넓고 확장된 세계를 다루는 것, 인간의 본성 같은 심오한 문제를 다루는 것, 기발하고 창의적이며 재미있는 것, 모두 남성의 기본값으로 설정되어 있다. 따라서 여성이 이런 문제를 다룰 경우 “여성 작가 같지가 않네.” 혹은 “여성 작가인 줄 몰랐어요.”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여성의 긍정적인 특성으로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탈여성’이 되는 것이다. 섬세한 내면의 문제와 같이 전형적인 ‘여성의 문제’로 치부되는 것들을 다루는 경우에만 비로소 다시 “여성스럽다”는 칭찬과 비판이 가해진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여성 작가들로서는 작품 활동을 하며 훨씬 강한 장벽을 만나게 된다. 사랑이야기와 개인의 내면, 일상생활 등의 소재를 남성 작가가 다룰 때는 “남성이 섬세하기까지 하다”며 칭찬을 듣지만, 여성이 그런 글을 쓰면 전형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이다. 많은 여성작가들이 자신의 성별을 숨기거나 중성적인 가명을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놀랍지 않은 이유이다.
 
어슐러 르 귄의 <밤의 언어>에는 이와 같이 작가의 성별에 따라오는 고정관념을 깊게 다룬 이야기가 실려있다. 그 이야기는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라는 작가가 쓴 <어느 늙은 유인원의 별 노래>라는 책의 머리말로서, 르 귄은 서두에서부터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와의 깊고 돈독한 우정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제임스의 정체는 사실 앨리스라는 것을 밝힌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오랫동안 남성의 가명을 쓰고, 당연히 남성인 줄 알았던 자신의 친구이자 동료 작가가 실은 여성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의 소회를 밝힌 글이다.
 
앨리스 셀던은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란 필명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상당히 인기를 얻었는데, 인기를 얻음에 따라 그의 글쓰기 방식을 둘러싸고 여러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한쪽에서는 ‘남성답지 않게 섬세한 면’이 돋보인다면서 실은 팁트리의 정체가 여성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하고, 다른 쪽에서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남성이 쓸 수 없고 헤밍웨이의 소설을 여성이 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글에서는 “피할 수 없는 남성적인 요소가 보인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팁트리는 여성을 이해하는 척 하지만 남성이기에 본질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으며, 잘못된 글쓰기라는 비난을 가하기도 했다. 물론 팁트리의 정체가 공개되면서 이러한 모든 추측은 한낱 오류일 뿐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지만.
 
사실 여성작가와 남성 작가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은 비단 남성들이나 성차별주의자들만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같은 여성 중에서도 여성작가의 작품을 무시하는 이들이 있고, 실제로 굉장히 여성주의적인 작품을 쓰고, 성폭력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는 글임에도 작가의 성별이 남성이라는 것만으로 부당한 공격을 당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젠더에 대한 고정관념과 어떤 기대치는 누구나 범할 수 있는 오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문학이나 글쓰기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밤의 언어>는 이처럼 문체, 젠더, 장르 등에 관한 사유가 담겨있는 에세이집이다. 앞선 내용은 책이 다루는 많은 주제 중에서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한 꼭지를 가져와서 적은 것이지만, 이외에도 문학, SF, 판타지, 여성적 문체 등 일반적으로 비하되거나 폄하되기 쉬운 것들에 대한 논리적이고 깊이 있는 통찰이 담겨 있다.
 
르 귄의 다른 많은 작품들이 그러하듯이, 이 책 또한 결코 읽기 쉽지 않다. 문장마다 배어있는 은유와 몇 겹씩 들어가는 사고는 몇 번씩이고 되새김질하며 읽어야 하기에 작고 얇아 보이지만 읽는데 상당한 공이 든다. “판타지, SF, 그리고 글쓰기에 관하여” 란 부제를 달고 있는 만큼 주로 장르소설과 르 귄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특화된 책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읽다 보면 결국 글쓰기와 장르를 뛰어넘는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어느 늙은 유인원의 별 노래> 머리말

왜 앨리스가 제임스고 제임스가 앨리스인지를 이야기하려면 또 문제가 상당히 달라지며, 이런 쪽으로 추측을 이어가다 보면 머지않아 내밀한 사정을 엿보고 침범하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선례가 이미 여럿 있다. 메리 앤 에번스는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으로, 빅토리아 시대 남성과 결혼 없이 동거하는 사이였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이 검열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필명을 사용했다. 하지만 남성의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할 이유가 있었을까? 사라 제인 윌리엄스라는 이름을 택해도 됐을텐데. 아무래도 그녀에게는 한동안 조지 엘리엇이 될 필요가, 또는 조지 엘리엇이 그녀가 될 필요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와 그는 힘을 합쳐서, 메리 앤이라는 여성 혼자서는 발목이 잡혔을 수도 있는 창조와 영혼의 막다른 골목과 늪지대를 함께 헤쳐 나온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느끼자마자 조지 엘리엇/메리 앤 에번스라는 정체성을 인정하고 공표했다. -p.340-341

우리들, 그러니까 독자와 작가와 평론가와 페미스트와 남성우월주의자와 성차별주의자와 비성차별주의자와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모두는, ‘남성의 집필 방식’과 ‘여성의 집필 방식’에 대해 여러 가정을 해 왔다. 이런 심리적 편견 덕분에 우리 SF계에서 가장 날카롭고 치밀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팁트리가 여성이라는 추측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그 이론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한다. 팁트리의 글에서는 피할 수 없는 남성적인 요소가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남성이 쓸 수 있다고도,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을 여성이 쓸 수 있다고도 생각한 적 없다”라고 말하게 되었다. 아주 솔직한 오류이며, 우리 모두가 저지른 오류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당화와 일반화는 오스틴과 헤밍웨이처럼 극단적인 예시를 들었다 하더라도, 항상 생각해 볼 여지를 남긴다. 우리는 이에 대해 재고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소설에서의 여성을 주제로 삼았던 우리의 모든 논의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런 논의를 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서도. 그리고 SF계의 여성을 언급하는 모든 논자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여성적 문체’에 대한 모든 논의도, ‘남성적 문체’에 대해 열등하거나 우월하다는 논의도, 그 필요성에 대한 논의도, 두 가지의 필연적 차이점에 대한 논의도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팁트리를 내밀한 장소에서 끌어내는 데 일조한, 그의 작품이 여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훌륭하고 탁월하지만 결국 남성의 작품이라는 한계가 존재한다고 말해 온 극단적 페미니즘의 폐쇄적인 태도도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 셀던이 다양한 남성 비평가들로부터 받게 될 대접, 즉 그녀의 작품이 남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훌륭하고 탁월하지만 결국 여성의 작품이라는 한계가 존재한다는 폄훼와 깔보는 언사 또한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 모든 가정을 우리는 다시 검토해야 한다. -p.34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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