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승혜 Oct 23. 2019

친절하게 웃어주면 결혼까지 생각하는 남자들

영화 <건축학개론>을 아주 싫어한다. 처음부터 싫었다. 물론 사람들이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는 이해하고, 나 역시 영화가 내뿜는 어떤 감수성에는 공감하는 측면이 있지만 말이다. 그 시절의 공기, 그 시절의 음악, 그 시절의 감성. 돌아오지 않는 시간에 대한 그리움.

다만 영화가 서연(수지와 한가인 분)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나중에 이 영화를 좋아하는 많은 남성분들이 그 대목에서 분노는커녕 오히려 감명을 받는 것을 보고 그만 놀라고 말았다. 아니 썸 타던 여자, 자기가 좋아하던 여자, 그런 모든 감정을 떠나 그렇게 오래 시간을 보내고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남자 선배한테 끌려가는 걸 보면 가서 구해줄 생각을 해야지 뒤에서 썅년이라고 욕을 하다니!!!!

물론 여러 가지 사정으로 개입을 못할 수도 있기는 하다. 그러면 그냥 돌아서고 말아야지, 아니 둘이 사귀길 했어, 뭐 바람을 피기를 했어, 사기를 치기를 했어, 돈을 빌리고 안 갚기를 했어? 욕은 왜 하는 것이고 배신감은 왜 느끼는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던 것.

그러나 그때로부터 또 몇 년의 세월이 흘렀고,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보건대 영화 속 이제훈과 엄태웅은 (많은) 한국 남성들이 여성에 대해 갖고 있는 보편적인 태도를 반영한 캐릭터라는 생각이 든다. 여성을 늘 어떤 연애의 대상으로만 인식하는 어떤 태도. 그러다 그 감정이 되돌아오지 않을 때는 슬픔을 넘어 분노를 느끼고, 그 대상이 되는 이를 썅년으로 만들어버리는 어떤 집단적인 감수성. 나를 좋아하는 것처럼 행동해놓고선 다른 남자랑 자러 가다니, 이것이 사기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는 울분. 물론 여성들 중에도 이상한 사람들이 있고 모든 남자가 그렇다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저런 식의 태도는 남자들에게서 유난히 더 많이 관찰되는 것 같다.

몇 년 전에 이런 포스팅을 한 적이 있다. 페이스북을 통해 비교적 대등한 입장으로 있을 수 있는 ‘남성’ 친구분들을 많이 만나게 되어 좋다고, 그전까지는 친구라고 생각해서 친하게 지내다가도 고백을 받거나 함으로써 사이가 틀어지는 경우가 많아 친한 남자 사람 친구가 없었다고. 그래서 남자들은 늘 불편하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서 좋다고. 거기에 한 남자분(지금은 페친이 아님)이 이런 댓글을 적었다. “지금 자기 인기 많았다고 자랑하는 거예요?” 원치 않게 연애의 대상으로 고려되어 불편했다는 글에 대고 인기 많았다고 자랑하는 거냐니.

그때 느꼈다. 여성들의 인식과 남성들의 인식은 참으로 다르다는 것을. 많은 남성들이 여성이 원치 않는 고백을 받거나 어떤 불편한 상황에 놓인 것을 애초부터 어떤 특혜나 이점으로 인식한다는 것을. 인기가 많거나 미모가 뛰어난 여성을 선망하다가도 고백을 거절당하거나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면 적대시하면서 꽃뱀이나 창녀로 만들며 혐오하는 것도 아마 그것 때문일 것이다. 어떤 자원(성, 미모)을 자신에게 주지 않는다고 분노하는 것. 그러나 성과 외모는 재화도 아닐뿐더러, 설사 재화라고 치더라도, 늘 약탈이나 손실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한다.

다 떠나서 생각해보면 정말 웃기는 일 아닌가. 본인 같으면 전혀 관심 없는 사람에게, 이를테면 직장 상사나 동료나 고객에게 관심받고 고백받으면 기분 좋겠냐고요. 물론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은 거울 속 자신 같은 사람이 자신을 쫓아다닌다는 상상을 해보기를 바란다.

<친절하게 웃어주면 결혼까지 생각하는 남자들>은 그런 면에서 제목부터가 너무나 신박한 책이다. 처음 듣는 순간 정말 맞는 말이라고 무릎을 쳤다. 책은 각종 고백을 폭력처럼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는 남성들의 사연을 비롯하여, 가정폭력, 강남역 살인사건, 대중문화 속 여성 혐오, 미투 운동 등, 다양한 이야기를 다양하게 다루는데, 요 몇 년간 페미니즘 관련 이슈가 되었던 이야기를 다시 한번 정리해볼 수 있었던 점에서 무척 좋았다. 박정훈 기자님의 글은 평소에도 챙겨보는 편인데, 이렇게 책으로 묶어서 읽으니 훨씬 더 집약적으로 와 닿는 부분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여성문제가 최우선이 아니라고. 여성이라고 절대적인 약자가 아니라고. 나는 그런 말에 동의하고 또 맞다고도 생각한다. 여성이라고 절대적 약자가 아니며, 세상에는 여성 이슈 말고도 수많은 이슈가 있다. 노동문제, 폭력, 계급, 장애, 퀴어, 기타 등등.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여성문제, 다른 말로 젠더 문제가 문제가 아니냐고 묻는다면 또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어떤 한 가지 주장을 위해 다른 주장을 묻어버릴 필요는 없으며 모두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낼 수 있는 목소리를 내면 된다고 생각한다. 여성문제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여성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사람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중요시 여기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여전히 나는 페미니즘에 대하여 대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두렵고, 여러모로 용기가 부족하다. 그런 면에서 이와 같은 책을 보면 참 반갑고 고마운 마음이 든다. 이런 책을 써주신 박정훈 기자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선량한 차별주의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