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책을 읽다가 중간에 멈출지 말지를 결정하는 지점이 있다.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단편인지 장편인지에 따라 다 다르겠지만, 요약하자면 대략 앞에서부터 100페이지 정도. 물론 그 이전에 포기하는 경우도 무진장 많다. 하여간 100페이지까지 설득이 안 되면 중간에 포기하고, 100페이지를 넘기게 되면 어지간한 이유가 있지 않는 한 끝까지 읽는다. 사실은 그래서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앤드류 숀 그리어의 <레스>를.
아.... 내가 이걸 왜 읽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페이지를 봤더니 한 140페이지쯤인 거라, 여태까지 읽은 것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면서 어쨌든 끝까지 꾸역꾸역 진도를 빼게 된 것이다. 다 읽고 나서는 글쎄, 기본적으로 읽은 것 자체를 후회할 정도는 아니지만, 거기에 들인 시간과 공력을 생각하면 다른 책을 몇 권은 더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본래는 퓰리처 상 수상작이기도 하고, 좋은 책을 많이 읽으시는 분들이 좋았다고 말씀하셔서 기대를 꽤 많이 했는데 말이다. 그 원인이 문체에 있는지, 내용에 있는지, 메시지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상당히 힘들게 읽었다.
사실은 줄거리 자체는 간단하다. 주인공 레스는 꽤나 화려한 젊은 시절 -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그를 이혼시킨 후 살림을 차리고, 심지어 그 유부남은 아주 유명한 시인으로서 후에 퓰리처 상을 수상하기도 하며, 그런 유우명한 애인을 두고서도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는 둥 - 을 보낸 게이 소설가로서 시인과 헤어진 이후 10여 년간 사랑과 우정 사이를 미묘하게 줄 타던, 말하자면 썸을 타던 상대의 결혼 소식에 충격받아 세계 여행을 결심한다.
아니, 결혼 소식에 충격을 받았다고 굳이 세계여행을! 하고 놀라는 사람들이 있겠으나, 그게 다 이유가 있다. 애초에 썸을 타던 인물은 레스의 친구라는 이름으로 가장하고는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라이벌이자 원수에 다름없는 카를로스의 양아들로서, 카를로스는 둘(양아들과 레스)의 관계를 당연히 눈치채고 있으며, 자신을 괴롭히려고 이 결혼식에 초대한 것이 틀림없는 바, 거절하자니 쪽이 팔리고 참가하자니 가슴이 아프던 찰나에, 어쩔 수 없이 생각해낸 묘책이 세계여행이었던 것이다. “안타깝지만 그 날짜에는 미리 계획된 일정이 있어 참석하기 어렵겠습니다.”
다행히도 본국(미국)에서는 전혀 인기가 없는 소설가 레스를 세계 어딘가에서는 인정해주는 분위기였는지, 이리저리 불러주는 곳이 많았던 것 같다. 소설은 그렇게 촘촘하게 일정을 계획한 뒤, 이별의 고통을 느낄 참이 없도록 전 세계를 누비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내용을 다룬다. 근 석 달에 걸쳐 프랑스 - 이탈리아 - 독일 - 모로코 - 인도 - 교토 등을 바탕으로. 그러니까 80일간의 세계일주 게이 소설가 편이라고 해야 할까.
뭐 그래 봤자 특별한 것은 없고 여행 틈틈이 떠올리는 젊은 시절의 추억에 대한 회고담 정도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세계적인 시인이자 퓰리처 상 수상자인 로버트와의 추억, 말하자면 ‘천재’의 내조자로서 그를 보필하며 사는 경험은 어땠는지, 그의 아내를 처음 만났던 순간은 어땠는지, 지금 이 시간쯤 결혼식을 올리고 있을 그의 썸이자 사랑이자 우정이자 애인 같은 존재와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인기 없는 소설가로 사는 경험은 어땠는지 등등에 관하여.
굳이 말하자면, 청춘을 잃어버린 사람들, 그중에서도 이제 젊은과 반짝임과 생기를 서서히 잃어가는 게이들에게 바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여행도 그렇고 주인공 레스에게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이 지나치게 맥락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다. 기본적으로 ‘무명’ 소설가라는데 세계 곳곳에 팬이 너무 많은 것 아닌가. 레스가 느꼈던 감정들도 뭐 머리로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닌데 전적으로 공감이 가는 것도 아니었고. 이건 내가 아직 나이가 덜 들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레스가 50살이니 50살 언저리가 되면 다르게 느껴질지도.
특이한 점은 이런 류(?)의 소설 치고는 보기 드물게 해피엔딩이라는 점이다. 이하는 스포일러이니 보기 싫으신 분은 조용히 뒤로 가기를.
그러니까 글쎄, 세계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더니 집에 사랑과 우정 사이를 미묘하게 오가던 썸의 상대, 지금쯤 성공리에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 중이었어야 할 그분께서 침대에 와 계셨다는 그런 이야기. 결혼식 올리고 몇 시간 있다가 문득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라는 것을, 내 사랑은 형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나. 야...
이하는 아마존에서 가장 높은 추천수를 받은 리뷰 중 하나.
“만약 당신이 아무런 재미있는 사건도 벌어지지 않는 와중에 예전 애인과 보냈던 시간을 그리워하며 한탄하는 게이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찾고 있다면 이 책을 추천. 만약 그게 아니라면 딴 거 찾아보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