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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Jan 06. 2020

목소리를 드릴게요

짧은 메모

간밤에 정세랑 작가의 새로 나온 SF 단편집 <목소리를 드릴게요> 읽었다. 마감하기 전까지 가능한 원고와 관계없는 , 특히 신간은 읽지 않으려고 했으나 워낙 좋아하는 작가이기 때문에 참지 못하고 펼쳤는데, 앞에 실린 1~2편만 읽어본다는  그만  권을 통째로 읽고 말았다.

정세랑의 소설은 묘한 것이, 개별 이야기의 내용이나 완성도와는 관계없이 읽고 나서 항상 좋은 감정을 남긴다는 것이다. 아마  전체에 밝은 기운이 넘실거려서인  같다. 전반적으로 명랑하고 경쾌하고 유쾌한 에너지가 깔려 있다. 심지어 절망스러운 상황에 대해 이야기할 때조차 그렇다.

다만 어쨌거나 ‘이야기 다루는 책이므로 ‘이야기 대한 평가를 안 할 수가 없는데, 워낙 SF 소설을 다른 장르에 비해 적게 읽기에 SF 스타일이 원래 이런지는  모르겠지만 내용 중에 다소 교조적이고 메시지가 직접적인 작품들이 있어서 그럴 때는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다. 메시지에 동의하지 않아서 느껴지는 거부감이라기보다는 너무 직접적이기 때문에 느껴지는 위화감이랄까? 그만큼 세계관이 확실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해서인  같기도 하지만.

하여간 SF 어쨌든 현실을 바꾸고 싶은 사람들이 쓰고,  읽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현실이 막막해서 구멍이 보이지 않을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써 도달하게 되는 이야기들. 특히나 ‘리셋이나, ‘리틀 베이비블루 ’, ‘7교시 같은 작품들이 그러한데, 현재의 파괴적이고 혼란스러운 문명,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듯한 상황을 조망하고,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한줄기 희망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많았다.

리셋 예로 들자면, 어느 날 갑자기 지구에 거대한 지렁이들이 출연해서 플라스틱이나 시멘트  썩지 않는 물질로  것은 모두 집어삼키고, 그러면서 인류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되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제목 그대로 인류의 대부분이 죽고 난 , 지구가 ‘리셋되는 이야기인 . 이후   되는 살아남은 인간들은 동식물들에게 최대한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지하에 문명을 건설하고, 혹여라도 사라진 지렁이들이 부활할까 봐 그전에 무분별하게 사용하던 일회용 제품 등은 최대한 사용을 배제하고, 동물 등도 단순히 오락거리를 위해 가두거나 헛되이 사육하는  없이 ‘자연 그대로 상태로 살아간다.

최근 대두되는 에코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가치를 거의 그대로 옮긴 셈인데, 에코 페미니즘에는 어느 정도 동의하는 부분도 있으나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어서 솔직히 말하면  이야기를 읽는 게  편안하지는 않았다. ‘자연 그대로 상태는 사람들의 생각만큼 그렇게 낭만적이지도, 평화적이지도 않으며 어쨌든 과학기술과 문명의 발전이 기여하는 부분이 훨씬 크다고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에코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가치를 심정적으로는 이해는 하면서도 머리로는 다소 나이브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에 호주에서  산불과 그로 인해 불타 죽은 5억 마리 동물들의 소식을 듣고 그들의 사체를 찍은 사진을 보면서,  어마어마한 죽음과 절망을 마주하면서, 어쩌면 그간 내가 가져왔던 ‘과학 기술의 발전이 모든 것을 해결할 거야’야말로 너무 나이브한 생각이었던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게 됐다. 이런 상황이라면 ‘리셋같은 이야기가 가장 필요할지도 모른다.

인간이라서 미안하다. 슬프고  슬프다.



영광은 분명 존재한다. 영광의 좁고 동그랗고 하얗게 빛나는 영역 안에 걸어 들어가고 싶은 사람에게 영광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거짓말이다. -p.244, 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

세상에는 후원을 받으면 그것으로 필수는 아니지만 있으면 훨씬  다치는 보호 장비를 사서 학생들에게 나눠주는 스승이 있고,  장부를 조작해 전부 빼돌리는 스승도 있었다.  간극을 이해하는  청소년에서 성인이 되는 과정이었다. -p.246, 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

끝이라 생각하니, 삭막한 지방 도시의 원룸촌도 아름다워 보였다. 이런 풍경이었구나, 나의 세계는. 감성이라  것도 없는  알았는데, 어딘가가 찡해져왔다. 완벽한 풍경이었다. 하루를  살아남는다 해도,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기 위해 다시는 내다보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런 완결성이 사람에겐 필요한 것이다. 운동선수에게 메달이 필요하듯이. -p.250, 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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