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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Jan 17. 2020

마성의 여자

<미친 사랑>



벌써 10년도 더 전의 일이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모르겠지만 일본 예능 프로그램 중에 <마성의 여자>라는 것이 있었다. 일반인 시청자에게 사연을 신청받아서 소개해주는 형태였는데, 이름에서도 예상 가능하겠지만, 그 사연이란 것의 대다수가 ‘마성의 여자’를 여자친구로 두어서 몸고생 맘고생하느라 괴롭다는 사람들이 주인공이었다.

예를 들면 여자친구가 생일선물로 플라즈마 TV (당시 200만 원 정도)를 사달라고 하는데 거절을 못하겠다든지, 만약 거절하면 엄청나게 혼날 텐데(?) 그게 두렵다든지, 본인이 아르바이트해서 벌어온 돈을 돈을 전부 본인 명품 사는데 써버린다든지, 온갖 살림을 다 시키고 제대로 안 하면 혼내는 식으로 자신을 노예처럼 부린다든지, 그러면서도 수시로 바람을 피우고 거짓말을 밥먹듯이 해서 너무 괴롭다든지, 기타 등등.

하여간 주로 남자들이 호구처럼 당하는 내용이었는데, 이상한 사람이야 어딜 가든 있으니 저런 사연들 자체가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다만 내게 있어서는 그 프로그램의 방향성이랄까, 패널들의 태도가 상당히 흥미로웠다. 우리나라 같으면 천하의 된장녀, 혹은 썅년으로 신상이 다 털리고 온갖 욕은 다 들어먹고 벌써 난리 난리가 나도 한참은 났을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지금 수준은 아니었어도 어쨌든 다들 인터넷도 했었고), 해당 여성에 대한 비판이나 비난보다는 ‘감탄’ 쪽이 더 큰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저건 좀 심했다, 너무했다, 충격적이다, 이런 뉘앙스도 분명 없지 않았지만, 그보다는, “와.... 정말이지 이 정도로 해내다니 대단하군요!”에 더 가까운 느낌이 있었다고나 할까. 프로그램 자체도 여성을 고발한다기보다는 남성이 그래서 현실(?)을 파악한 뒤, 헤어질 수 있는 용기를 얻게끔 하려는 목적이 더 컸다. 물론 거기 출연한 남자들 대다수는 그런 충고를 듣고도 헤어지지 못했지만.

그때 그렇게 당하는 남자들을 보면서 와... 진짜 저거 바보 아니야? 싶었던 한편으로는, 그 남자들과 패널들의 태도를 보면서 일본과 우리나라의 차이점을 느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가부장적이라 생각하지만, 의외의 측면에서 굉장히 다양한(?) 여성 캐릭터에 대한 니즈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마디로 ‘마성의 여자’에 대한 동경이 존재하는 것이다. 카리스마 있고, 남성을 함부로 다루고, 위에서 군림하는 어떤 사악한 여성 캐릭터에 대한 성적 매력을 느끼는 특정한 집단이 일정 숫자 이상 존재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토 준지의 만화에 등장하는 ‘토미에’ 캐릭터도 따지고 보면 이 ‘마성의 여자’와 비스무레하고.

이번에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미친 사랑>이라는 소설을 보면서 다시금 ‘마성의 여자’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소설을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의 작품 거의 대부분에 반드시 이런 미친 카리스마, 요망한 매력으로 남자를 홀리는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 물론 ‘요부’ 혹은 ‘마녀’ 캐릭터를 자주 다루는 작가는 다니자키 외에도 많지만, 다니자키의 특징은 일반적으로 그런 여성 캐릭터를 굉장히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다른 작가들하고 다르게, 엄청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것처럼 그려낸다는 것이다. 결말은 대개 남자 주인공이 그런 마성의 여자의 매력에 굴복하여 그녀를 숭배하며 시종처럼 산다는 내용이고. ㅋㅋㅋ

이 작품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주인공인 “나”는 건실한 회사에 다니는 30대 청년으로 남들이 보기에는 엄청 점잖고 여자라고는 모르는 쑥맥처럼 보여서 평소에 ‘선비’라는 별명으로 불리지만, 사실 24시간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여자 생각을 하고, 언제 어디를 가든 주변에 있는 여자들이 대한 레이더를 거두지 않는 타입인데, 읽어보면 거의 전형적인 남초 커뮤니티의 헤비 유저 같은 느낌이다. 본인 스스로는 한번도 여자 경험은 없지만 마음만 먹으면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도 그렇고, 실제로 본인에게 관심 갖는 여자는 한 명도 없는데 본인 혼자 전 세계 여자를 품평하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심지어는 그런 주제에 외국인(서양인)을 밝혀서 서양인스러운 특성에 상당한 동경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굉장한 유머 포인트인데, 실제로 다니자키 본인이 서양인을 좋아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나’는 어느 날 우연히 찻집(우리나라로 치면 티켓다방)에 갔다가 15살 나오미란 소녀를 만나게 되고, 서양인스러운 이름(ㅋㅋㅋ)과 외모를 가졌다는 이유로 그녀에게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던 주인공은 나중에는 나오미를 아예 데리고 살기 시작하는데, 하는 짓 보면 정말 프린세스 메이커 실사판으로 해도 좋을 정도로 유사하다.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뭐 교육시키고. 놀라운 건 주인공이 그런 일에 상당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 심지어는 ‘최고의 부인’으로 길러내겠다는 목표까지 세우는데, 그 와중에 매일매일 손수 목욕을 시키면서 키가 얼마나 자랐는지, 피부의 감촉은 어땠는지, 빛깔과 냄새는 어땠는지 등등까지 기록으로 남기는 모습을 보면 주인공 역시 보통 이상한 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여간 그렇게 주인공에게 살아있는 인형처럼 사육당하던, 그럼에도 늘 얌전하고 유순하던 나오미가 십대 후반, 그리고 이십대로 넘어가면서 점점 변하기 시작한다. 다양한 사교활동을 즐기면서 점차 집안일을 소홀히 하고, 주인공에게 관심도 주지 않고, 다른 남자들하고 적극적으로 놀기 시작하는데, 그럴 때마다 주인공이 불쾌한 반응을 보이면 어차피 친구사이인데 뭐 어떠냐는 답변을 한다. 그러나 모두가 예상 가능하다시피 그 관계는 친구 이상이었고, 심지어 그렇게 관계를 맺었던 사람이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주인공은 격분하여 나오미를 쫓아낸다.

하지만 우리의 나오미는 마성의 여자. 처음에는 순순히 쫓겨나는 듯싶다가 나중에는 결국 주인공의 마음을 되돌려 놓고, 그걸 넘어서 그를 마치 노예처럼 부리는 지경에 이르는데.... 그 사연이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읽어보시면 되고.

아무튼 처음에는 격분하고 괘씸해하던 주인공이 나중에는 거의 비굴하게 매달리며 무조건 주인님(!)께 순종하고 복종하겠다고 다짐하는 부분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사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소설 속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 연인에게도 ‘주인님’ ‘주인님’ 하고 부르며 본인을 노예, 또는 하인이라고 지칭했는데, 참으로 취향이 한결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비록 내용 때문에 읽는 사람에 따라 호불호는 꽤나 갈릴 수 있겠지만, 어쨌든 선호도와는 관계없이 한 번 읽기 시작하면 굉장히 진도가 빠르게 넘어가는 소설이다. 문장이 정말로 매끄럽고 부드러워서 아주 아주 잘 읽힌다. 다니자키 준이치로 소설들 대부분이 그러한 편인데, 그만큼 끝까지 이야기를 읽게 만드는 힘이 있는 작가다. 개인적으로는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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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모범적인 - 검소하고 착실하며, 너무 재미가 없을 만큼 평범하고, 아무 불평도 불만도 없이 하루하루 일하며 지내는 - 월급쟁이, 당시의 나는 대체로 그런 편이었습니다. ‘가와이 조지군이라면 회사 안에서도 ‘군자라는 평판이 있었을 정도니까요. (...)

나는 원래 농촌에서 자란 무지렁이여서 남과  사귀지 못하고, 따라서 이성과 교제한 적은  번도 없었고,  때문에 ‘군자라고 불리기도 했겠지만, 겉만 군자일  마음속은  빈틈이 없어서, 길을 걸을 때나 매일 아침 전차를  때도 여자한테는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지요. -p.11-12

하지만  당시 나오미보다 아름다운 여자는 없다고 단정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전차 안이나 제국극장의 복도나 긴자 거리 같은 곳에서 마주치는 아가씨들 중에는 물론 나오미보다 아름다운 여자가 많았습니다. 나오미가  아름다워질지 어떨지는 장래의 문제지만, 열다섯  정도의 소녀인 만큼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기대가 되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애당초 나의 계획은, 어쨌든  아이를 맡아서 돌봐주자, 그래서 가망이 있으면 많이 가르쳐서 아내로 삼아도 괜찮다는 정도였습니다. -p.12

>> 인용문만 읽어도 대체 무슨 미친 근자감임? 이란 생각이 절로 듦.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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