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있는 곳
줌파 라히리의 <내가 있는 곳>을 읽었다. 사실은 처음부터 마음먹고 읽으려던 것은 아니었다. 조만간 누굴 만날 일이 있는데 그 사람에게 책을 한 권 선물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책장에 꽂힌 책을 이것저것 돌아보다가 이게 손에 잡혔고, 안 읽은 책을 내용도 모른 채 선물할 수는 없으니 잠깐 훑어본다는 게 그만 선 자리에서 몇십 페이지를 읽고 결국 그대로 주저앉아서 끝까지 보게 되었다.
다 읽고 나서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마음에 들었지만, 그렇다고 한마디로 뭐라 정의 내리기는 어려운 그런 책이었다. 처음에는 소설집인 줄 알고 샀는데 읽다 보니 에세이인지 일기인지 산문인지 소설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인물도 공간도 시간도 불분명한 2-3페이지 남짓의 짧은 글이 여럿 등장한다. 이름도 직업도 신원도 밝혀지지 않은 40대 여성이 그날그날 겪었던 일과 그에 대한 짧은 감상을 이야기한다. 당연히 일기나 에세이일 것이라 생각했다가 책 표지 뒷면에 최은영 작가가 “이 소설은...”하고 쓴 추천사가 실린 것을 보고 다시 한번 혼란스러워졌지만... 뭐 아무려면 어떠랴. 형태가 에세이더라도 내용상 허구가 가미되어 있다면 소설이 되는 거겠지.
이 짧은 이야기들은 영국 런던의 벵골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을 갔던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에 살면서 이탈리아어로 적은 것들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문장들이 참 단순하고 간결하다. 무엇에 관하든 거의 군더더기가 없었다. 아마 군더더기를 표현할 만큼의 어휘 능력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테지만, 그게 역설적으로 글을 더 좋게 만들어주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마치 아고타 크리스토프처럼.
헝가리 출신으로 스위스에 거주하며 프랑스어로 글을 썼던 아고타 크리스토프 역시 모국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매우 기초적이고 쉬운 글밖에 쓸 수 없었다고 한다. 아주 쉽고 단순한 문장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글에는 특유의 정확하고 명료한 느낌들이 있다.
전반적으로 참으로 쓸쓸하고도 고독한 느낌이 드는 글들이었는데, 그 밑바탕에 깔린 정서적인 면에 있어서는 스가 아쓰코나 허수경의 글과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세 사람 다 고향이 아닌 타국을 오랫동안 떠돌았던 사람들이다.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고,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늘 부유하는 느낌으로 살던 사람들. 거기서 오는 불안과 쓸쓸함, 고독감이 짙게 배어 있는 글들.
물론 읽다 보면 이렇게 불안하고 힘들고 고독하고 쓸쓸한데 왜 이러고 살아? 란 의문이 드는 순간들이 있기는 하다. 생각해보면 언제든 (고향으로) 돌아가려면 돌아갈 수 있고, 정착하려면 정착할 수 있을 텐데 본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니까. 그런데 사실은 일정 시간 이상 이방인으로 계속 생활하다 보면 그러는 사이 그 사람의 자아나 정체성은 이전과는 아주 달라져버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되면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니고,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더 이상은 정착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아예 체질적으로 말이지. 고향에 돌아가면 이전에 떠돌던 공간을 그리워하게 되고, 떠도는 곳에서는 내 집 같지 않은 느낌을 받게 되고, 그렇게 마음의 어딘가가 늘 갈 곳을 잃고 헤매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 비단 이들뿐만이 아니라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대다수가 그러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내가 있는 곳>이란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화자인 ‘나’ (에세이라 생각하면 줌파 라히리일테고, 아니라면 그냥 주인공)는 책 속에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지명은 나오지 않지만 장소는 계속해서 등장한다. 바닷가, 병원, 공원, 길거리, 다리 위, 집, 여행지, 식당, 상점, 기타 등등. 그렇게 어느 곳이나 다니지만, 사실 진짜 ‘나’는 그 어디에도 없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어디에도 머무를 수 없는 사람. 결론적으로 ‘내가 있는 곳’ 혹 ‘있을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몇 가지 인상 깊은 구절이 있었지만 속마음을 들킬 것 같아서 옮겨 적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