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된 장소에서>
<컬트종교와 옴진리교, 그리고 신천지>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겪으면서 사회 내외부적으로 숨어 있던 많은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야깃거리야 수도 없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신천지 문제가 가장 신경이 쓰였고, 여러모로 궁금한 지점이 많아 무라카미 하루키의 <약속된 장소에서>를 읽어보았다. 언젠가 별생각 없이 사두었던 책인데... 역시 책은 사두면 언젠가는 읽게 되나 보다.
하루키는 도쿄 지하철 독가스 테러 사건 피해자들을 인터뷰한 <언더그라운드>를 출간한 뒤, 그에 상응하는 의미에서 옴진리교에 한때 몸을 담았거나 혹은 여전히 몸을 담고 있는 8명의 신도를 인터뷰하여 이 책을 펴냈다.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 책은 “가해자에게도 할 말이 있다” 혹은 “그들도 불쌍한 사람이다”는 식으로 해당 사건의 가해자들을 옹호하거나 혹은 옴진리교 신도들을 변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보다는 대체 그들이 어떻게 하다가 해당 종교에 투신을 하게 되었는지, 그들이 바라본 교주는 어떤 존재였는지, 교단 안의 규칙과 질서는 어떠했는지, 부당한 상황을 맞이했을 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등등을 구체적으로 상세히 들어봄으로써 ‘컬트 종교’ 그 자체를 이해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러니까 보다 적나라하게 말해보자면 “대체 왜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이 저 지경이 되었을까”하는 의문에서 출발한 것이다.
사실은 나 역시 오래전부터 비슷한 의문을 갖고 있었다. 이번의 신천지 사태를 일어나게 한 이만희라는 사람을 봐도 그렇고, 옴진리교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 역시 그렇고, 그 밖에도 기독교 내부의 ‘일부’ 목사들을 보면, 그 외모부터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이르기까지 도저히 제정신이라고 볼 수가 없는데, 공중부양이니, 생명책이니, 프리메이슨이니 딱 보거나 들어도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을 텐데, 그런 이야기를 듣고서도 목사님, 교주님, 하나님 하면서 열광하는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는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이.
그런데 책을 읽고 나서 그런 의문이 단번에 해소가 되었다. 누구나 자기혐오나 불안, 고독감 등 인간이 필연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부정적인 감정에 시달리고, 그 감정이 당연히 불쾌하니 그것을 없애기 위한 이런저런 노력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된 것이 옴진리교 혹은 신천지 혹은 기타 종교 등등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달리 ‘이상한’ 사람이 빠져들었다기보다는 정서적으로 남보다 취약한 사람이 재수 없게 걸려든 경우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잘 와 닿지 않을 텐데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작업은 이런 식으로 시작된다.
예를 들어 당신이 아주 가끔이지만 굉장히 외롭고, 두렵고, 불안한 마음이 들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다정한 말도 해주고, 뭔가 친근감을 표시해주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런 상황이 일정기간 이상 지속되면 인간으로서 당연히 그 사람에게 일종의 우정 혹은 호감을 갖게 된다. 그렇게 점점 사이가 가까워지고, 절친이 되면서 일종의 신뢰관계를 쌓게 되는데, 어느 날 문득 그 사람이 권유한다. ‘요가’를 한 번 해보는 게 어때? 이거 하고 나서 난 자존감도 많이 높아졌고, 마음도 안정됐어.
결국 신뢰하는 사람의 조언에 힘입어 당신은 자연스레 요가에 입문하게 되는데, 확실히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느낌이 들면서 만족스럽다. 예전보다 두려움과 불안도 줄어들었다. 그렇게 당신은 자연스레 요가를 좋아하게 된다. 그런데 가까이서 지켜본 그 사람은 평소에 보던 것보다 더 굉장하게 느껴진다. 신기한 동작도 하고, 뭔가 엄청난 고수 같다.
어느덧 당신 역시 그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나 좀처럼 요가의 실력은 늘지를 않고, 자연스레 마음도 초조해지고 뭔가 요가를 시작하기 전보다 더 정신이 산만하고 번민이 늘어난 것만 같다. 이런 고민을 상담하면 그 사람은 말한다. 아직 수행이 부족해서 그래. 돈과 시간을 더 많이 들이면 괜찮아. 결국 당신은 돈과 시간을 더 많이 들이게 되고, 어느덧 요가에 깊숙이 중독되고 빠져들게 된다. 요가 자체에도 심취하고, 함께 요가를 하는 사람들의 커뮤니티에도 완벽히 녹아든다. 더 이상 요가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사이비 종교 이야기하다 말고 웬 요가? 싶겠지만, 사실은 사이비 종교의 맥락 역시 다르지 않다. 매커니즘이 완벽히 똑같다. 여기서 ‘요가’는 그 무엇으로든 대체될 수 있다. 요가를 예시로 들어 미안하지만, 요가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결핍을 해소하려는 어떤 종류의 활동이든 그 대체재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신천지가 될 수도 있고, 옴진리교가 될 수도 있다. 심지어 기독교도 될 수 있고, 막시즘도 될 수 있고, 박정희도 될 수 있고, 환단고기가 될 수도 있다.
실제 옴진리교의 경우 저런 식으로 ‘마음의 안정’을 위해 요가를 시작하고, 그 안에서 아사하라 쇼코와 옴진리교를 만나면서 모든 것이 시작된 경우가 많았다. 일단 발을 들인 후 주변인들은 계급이 높아져야 본질에 닿을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계급이 높아지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식으로 설명하며 교단에서 지정한 책을 수십 권 읽히고, 교단의 만트라 같은 것을 외게 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세뇌가 된다.
한편 계급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커뮤니티 내부에서의 지위가 높아지고 교주와의 관계도 돈독해지므로 레벨이 높은 사람들은 상대적 우월감을, 레벨이 낮은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과 동시에 아직 수행이 부족하다는 자괴감에 시달린다. 그렇게 모두가 ‘레벨업’에 신경을 쓰고, 그 과정에서 교주는 점차 신격화되고, 사람들은 무엇이 본래 목표였는지 자체를 잊어버리고 내부의 규율은 점차 망가지게 된다. 결국 나중에는 독방에 갇히거나 이상한 비디오를 강제로 시청하거나 고문 수준의 처벌을 받더라도 아, 이건 전부 내가 잘못해서 생긴 일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로 사고가 망가져 버리는 것이다.
결국 ‘멍청하거나’, ‘바보 거나’, ‘이상한’ 사람이라서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그냥 운이 나쁘면 누가나 빠져들 수 있는 것이 사이비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에이 설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아닐 거야, 하는 사람들도 결코 안심할 수는 없는 것이, 세상에 대해 의문을 품은, 이른바 철학적인 사람들이 더 이렇게 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단순하고 게으른 사람들은 오히려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그냥 내키는 대로 살아버릴 가능성이 있지만, ‘더 나은 내’가 되고 싶다는 욕구를 품은 사람들은 이런저런 시도도 해보고, 수행도 해보고, 성찰도 하는 과정에서 자칫 저런 길로 들어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신도들을 인터뷰하다가 여러 번 섬찟함을 느꼈다고 밝히는데, ‘내면의 자아’를 알기 위해 소설을 쓰는 자신의 욕구와, 그들이 옴진리교에 입문하게 된 욕구가 어느 정도 맞닿아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아성찰’ 혹은 ‘내면 탐구’의 욕구가 강할수록, 그리고 그러한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일수록 저런 종교에 한 번 발을 담그면 걷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인데,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 있다. 더 선량하고 정의로울수록 더욱 악의 길로 빠지기 쉽다는 것이.
사실 이 모든 문제는 인간이 결국 불완전하고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 같다. 불안한 인간은 자신의 불안한 상태를 견딜 수 없고, 그걸 어떤 식으로든 해소하고, ‘진리’와 ‘정답’을 알고 싶어 하는데 세상에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은 늘 누군가 답을 알려주기를 원하고,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도 무언가에 기대고 싶어 하고, 기대 버리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게 ‘악한’ 무언가와 만나게 되는 일도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평소 스스로를 ‘종교적’인 사람이라고는 단 한 번도 여겨본 적이 없었던 터라, 이런 이야기는 거의 강 건너 불구경 수준으로만 생각했었는데, 그들과 나 사이에 실제로는 종이 한 장 정도의 거리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여러모로 섬뜩해졌던 책이다. 나 역시 언제든 잘못된 길로 갈 수 있고, 정신줄을 놓아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렵고 무섭다. 결국은 결핍과 불안함을 견뎌내는 개개인의 내면의 힘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게 무엇인지, 어떻게 기를 수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주위 친구들과도 그런 얘기를 자주 나눴죠. 저런 건 아무래도 좀 이상하다고.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해도 최종적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는 건 결국 나의 더러움 때문’이라거나 ‘카르마다’라고 납득하고, 거기서 얘기가 끝나버렸죠. 그래서 어떤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라도 잘못은 모두 자기 자신의 더러움 때문인 거예요. 또 반대로 좋은 일이 있으면, ‘이건 모두 구루 덕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 그런 것이 결국 우리가 자아를 없애가는 과정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p.129
또한 그 무렵부터 수행에 ‘거꾸로 매달기’까지 도입되었습니다. 듣기에는 별것 아닌 것 같겠지만, 그건 명백한 ‘고문’입니다. 반복해서 매달리는 사이, 묶인 다리 부분에 피가 안 통해서 정말로 다리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고 그 일을 당한 당사자들이 말했습니다. (...) 그런데 신기하게도 실제로 거꾸로 매달렸던 사람들은 지금도 교단에 꽤 많이 남아 있어요. 말하자면 무지막지한 고통을 당해 죽기 직전에, 극한에 이른 마지막 순간에 “잘 참아냈다”라고 따뜻한 말을 던져주는 겁니다. 그러면 그 한마디에 ‘아아, 난 주어진 시련을 극복했구나. 구루여, 감사합니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p.131-132
그런데 마쓰모토가 하는 건 간단히 말하면 ‘자기’와 ‘번뇌’의 동일화입니다. 에고를 없애려면 자기도 함께 없애라고 하니까요. 인간은 결국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토록 괴로운 것이니, 그 ‘자기’를 버리면 눈부시게 빛나는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다고. 그런데 이 말은 불교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릅니다. 일종의 가치전도죠. 자기랑 찾아내야 할 대상이지, 버려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지하철 사린사건 같은 테러 범죄는 그런 안이한 자기 상길 과정에서 생겨났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기가 사라지면, 사람은 무차별 살인이나 테러에도 무감각해져버리죠.
결국 옴진리교가 한 일은 번뇌의 근원적 해결을 마련해주기보다는, 자기를 버리고 시키는 대로 순종할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었습니다. -p.140
따라서 옴진리교 성취자란 다시 말해 ‘옴진리교 색깔에 완전히 물든’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지, 진리를 체득한 진정한 ‘해탈자’는 아닙니다. 현세를 버리고 출가한 신자가 ‘구제’라는 이름하에 미친 듯이 보시 모으기에 연연하는 것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일이죠. -p.140
옴진리교의 책을 읽고 가장 기분이 좋았던 점은, ‘이 세계는 나쁜 세계다’라고 분명하게 써놓았다는 겁니다. 저는 그것을 읽고 너무나 기뻤습니다. 이렇게 심하게 불평등한 사회는 멸망해버리는 게 낫다고 줄곧 생각해왔는데, 그 말을 확실하게 해주니까요. -p.180-181
스스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결단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아무래도 영향이 컸어요. 그냥 맡겨두면 되니까요. 지시가 내려오면 그 지시대로 움직이면 그만이에요. 그리고 그 지시는 해탈했다는 아사하라 씨한테서 온 것이니, 모든 건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한 거겠죠. -p.217
하야오 : 직접 범죄에 관련되었다면 몰라도, 이 (인터뷰를 한) 사람들은 전혀 몰랐으니까요. 그러니 후회하지도 않고, 또한 계속하고 싶어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무라카미 씨가 지적한 대로, 그 사람들에게 그만두라고 하려면 그 대신 무엇을 하면 좋을지 대책이 있어야겠죠.
이건 시너 중독에 걸린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시너를 흡입하는 아이에게, 그건 안 좋은 일이니 그만두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흡입하지 않는 게 좋다는 거야 당사자도 분명히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시너를 그만두고, 그 아이가 앞으로 살아갈 세계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는 한, 완벽하게 손떼게 할 수는 없습니다. 술을 마시는 사람도 그렇겠죠. 술을 끊는 게 좋다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는 그 세계가 의미가 있기 때문에 술을 계속 마시는 겁니다. 그러니 옴진리교에서 나온 사람도 솔직하게 말하면 정말 딱하죠. -p.300